빈센트 반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누런 밀밭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참 후, 한 남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흘리며 라브 여관으로 올라왔다. 3층의 장기 투숙객 빈센트 반 고흐였다. 깜짝 놀란 여관 주인이 의사를 불렀고, 의사가 달려와서 응급 처치를 했다. 곧이어 동생 테오가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급히 오베르로 내려왔다.
7월 29일 밤 서른일곱 살의 가난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고흐는 눈을 감았다.
테오는 형의 품속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태오에게 쓴 원망 가득한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거래가 어렵다는 테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화가 공동체의 꿈을 다시 펼치고 싶었던 반고흐는 자꾸만 발작이 심해져서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있었다. 더구나 유일한 후원자인 테오마저 부정적인 소식을 전해오자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태오는 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참석해 준 형의 지인들에게 형의 그림들을 나눠줬다. 형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예술과 생계 사이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화가들을 위해, 동료화가들이 공동으로 그림값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 생활비 전액을 동생 테오에게 지원받는 그의 처지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어쨌든 반고흐는 아를에 ‘노란 집’을 마련했고, 첫 번째 동료로 폴 고갱을 꼽았다. 하지만 고갱에게 아를은 매력이 없었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테오가 고갱을 설득했다. 아를에서 형과 함께 지내면 고갱의 그림을 한 달에 한 점씩 팔아주겠다고.
고갱을 만난 반고흐는 환호했다. 이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갱처럼 멋진 동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지낼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반고흐는 고갱 방을 장식해주고 싶어서 해바라기 그림을 엿새만에 4점이나 그렸다. 하지만 반고흐는 고갱과 산지 두 달이 지난밤에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경찰이 노란 집으로 출동했고, 고갱은 테오에게 빨리 오라는 전보를 보내고 서둘러 아를을 떠났다.
반고흐는 대체 왜 귀를 잘랐을까? 우울증이 심했던 빈센트가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보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분노했고, 테오의 결혼소식에 앞으로 테오의 지원이 끊기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고갱은 노란 집에 오고 나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반고흐와 같이 있기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이에 고흐는 절망했다. 고갱과 함께 만들어가려던 꿈이 시작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테오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해야 했다. 동생에게 후원을 받은 지 10년이 가까워지는데 제대로 그림 한 점 팔지 못한 채 재료비만 쏟아붓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채색 때문에 물감 값을 더 보내라고 끊임없이 독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테오는 반고흐가 파리로 가고 싶다고 계속 부탁했지만 못 들은 척했고, 그 사이 테오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아들도 태어났다. 형의 사고를 접하자 테오는 무엇보다도 고갱을 아를로 보낸 자신을 자책했다.
반고흐의 작품 중 유명한 ‘밤의 카페테라스’ 앞이다. 원래는 카페 색깔이 노란색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림과 똑같이 덧칠했다고 한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고흐는 그의 동생 태오에게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정과 기복을 감성적으로 편지에 썼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흐는 글을 썼어도 훌륭한 작가가 됐을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화가였다.
“특히 밤하늘의 별을 찍어 넣은 순간이 정말 즐거워!”
밤하늘을 표현하는데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흐는 행복한 기분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테오는 형 빈센트를 사랑했다. 까탈스럽고 때론 공격적이지만, 미치광이 같은 행동 안에 감춰진 순수하고 가녀린 영혼을 안타까워했다. 거친 붓질 아래 숨겨진 천재성을 보이는 형의 실패를 함께 아파했다. 하지만 너무나 극단적인 성격이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예민한 형에게는 조심스러운 격려 외에는 자유롭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빈센트가 왜 남들처럼 평범하고 원만하게 사는 게 힘들었는지 테오로서도 정확히 알 방법은 없었다. 빈센트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내내, 테오는 형의 곁을 지켰다. 27세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무모한 선언을 응원했고, 팔릴 만한 예쁜 그림이 아니라 칙칙한 그림만 고집스럽게 그려도 이해했다. 수년째 발전이 없는 캔버스를 보고도 힐난의 말을 꾹 참았다. 그런데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소연과 비난과 요구도 묵묵히 견뎌냈다. 그렇게 10년째 외면받던 형의 그림이 드디어 1점(붉은 포도밭) 팔리고, 테오 자신도 가족과 갓난아기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요일 밤, 형의 자살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아를에서 첫 번째 발작으로 빈센트는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한 이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빈센트는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고갱의 부재를 받아들이려 애썼고, 불시에 발작과 졸도 증상이 나타나곤 했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고흐는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펠릭스 레이 박사의 허락을 받고 낮에는 작업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노란 집 주변에 거주하는 아를의 주민들이 ”미치광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달라. “는 진정서를 시장에게 제출했고, 레이 박사가 출타 중이던 틈에 고흐를 강제로 재입원시켰다. 그 당시 그렇게 터부시 하던 반고흐가 지금은 아를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이 아이러니라니. 세상사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테오는 형에게 미안했다. 형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사랑하는 요안나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불안하기는 고흐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 자신의 영혼까지 보듬고 궂은일을 도맡아 보살펴주던 소울메이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하지만 생폴 정신병원에서의 일 년은 그에게 실수였다. 반고흐는 그림으로만 보자면 그 당시 화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발작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그림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그러나 자유롭게 그림을 잘 그리는가 싶다가도 물감을 마신다고 소란을 피우곤 했다.
빈센트는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해서 색채의 농담으로 표현하는 임파스토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말 그대로 물감을 아주 두꺼운 붓이나 나이프, 때로는 그냥 손가락으로 푹 찍어 반죽처럼 두텁게 덧칠해서, 색은 물론이고 질감까지 드러내는 표현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반고흐의 그림에서 바람의 그림자, 하늘의 무한한 깊이까지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 두 색상을 나란히 찍듯이 칠하기 때문에 색과 질감뿐만 아니라 수많은 회색조의 음영까지 생겨서 그림에서 입체감과 생동감이 뿜어져 나온다.
“마침내 별이 가득한 하늘을 실제로 밤의 가스등 아래에서 색을 칠했어. 청록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큰 곰자리가 반짝이는데 그 차분하고 연한 가스등 빛이 금빛과 대조를 이루고 그 앞쪽에는 두 연인의 모습이 보여.”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생레미 정신요양원에 있을 당시 그린 그림이다.
빈센트는 아를의 밤풍경과 별이 빛나는 하늘을 매우 좋아했다. 고흐는 론강가에 앉아서 밤의 빛과 물에 비치는 밤풍경을 그렸다. 태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밤하늘은 그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하늘은 그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처럼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론강가를 천천히 걸었다. 절정으로 치닫는 슬픔과 번뇌로 괴로웠을 반고흐를 생각하며. 그토록 치열하게 매달렸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마지막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영혼이 가련해서 가슴이 저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고흐의 자살을 암시하는 작품이라는 평이 많다. 어두우면서도 푸른 밤하늘, 불길한 까마귀 떼, 밀밭을 보며 그 당시 고흐가 느꼈을 우울함과 외로움을 알 수 있다. 고흐는 이 밀밭 안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곳은 성난 하늘 아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어.”
고흐가 태오에게 쓴 편지이다.
생전에는 그림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게 된 빈센트 반 고흐. 비운의 천재화가 형 빈센트와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 두 형제가 함께한 고독한 삶의 이야기는 애 닮고 가슴 시리다. 테오는 형을 보내고 6개월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891년 1월 25일)
그동안 받았던 말 못 할 스트레스가 병이 되었을 것이다
테오의 아내였던 요안나는 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고 감명을 받아서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젊은 요안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다. 생계수단으로 하숙집을 차려 운영하는 틈틈이 고흐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평론가들을 자신의 하숙집에 초대하여. 고흐의 그림을 보여주고 미술관에 전시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 요안나. 평론가들은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그림과 접목하여 보기 시작했고, 서서히 고흐의 그림이 인정받기 시작한다. 반고흐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그만큼 중요하다. 오늘날의 고흐가 있기까지 요안나의 노력이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4년 테오의 무덤을 빈센트의 무덤 옆으로 옮겨주고, 하나의 덩굴을 두 개의 무덤에 심어주었다. 형제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덩굴잎을 이불처럼 같이 덮고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공동묘지에 평안히 누워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며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화가로서 실패했던 형제의 삶이 오롯이 느껴져 가슴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간 듯 쓰리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