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서 자유하기를.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냥 토요일이 아니라 신나는 토요일이다.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와서 하루 2시간 영어수업을 듣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등록을 하고 나니 그만둘 수가 없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선생님께 영어 문법 수업을 듣는 건 너무 힘들다. 파파고(번역 앱)로 찾아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이제 다음 달이면 여기 학원에도 영어 캠프가 시작될 뗀데 그럼 초등학생들이 몰려들 데고 그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캠프 시즌에는 좀 쉴까 하는 간절함이 있지만 ‘마닐라에 가서 영어와 운동 두 가지는 무조건 할 계획이다’라는 말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있다면 술(맥주) 마시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게 또 나한테는 영어만치나 어려운 문제다. 맥주 한 잔이면 그 자리에 누워서 바로 자야 되는 체질이라 지금껏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까워지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여행지에서 그곳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나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한 잔의 맥주가 간절할 때가 있다. 마을의 전통주를 동네 어르신이 권하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순간도 있다
군대 생활할 때도 24시간 근무하는 부대 특성상 매일 밤마다 한 잔씩 하는 분위기였는데 매번 소주 한 잔 받아 놓고 결국 안주만 집어먹다 끝나곤 했다. 와인이 좋다는 말을 듣고 마트에서 작은 병을 골라 연습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허사였다.
학원에서는 하루 20개 영어 단어를 테스트를 하고 월말에는 몰아서 시험을 친다. 어제는 단어 20개를 외우다 이상해서 보니 그저께 것을 다시 보고 있던 것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어쩌다 송금이라도 한 번 하려면 계좌번호를 세 번 이상 봐야 하고 전화번호도 한 번에 다 못 외우는 나이가 되었다.
영어든 술이든 도전하기 벅찬 미션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또 아쉽다. 둘 다 여행을 직업적으로 하려는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옛날에 일본어 학원을 처음 다닐 때가 생각난다. 대구 동성로 시내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저녁에 수업을 들었는데 예습이고 복습이고 당최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지. ‘근데 어떻게 잘하게 되었냐고?’정답은 ‘계속했기’때문이다. 6개월 문법 과정을 1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된다. 물론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나 같은 경우는 학원 강사까지 했으니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나를 가르쳤던 학원 선생님이랑 가끔 밥을 먹었는데 그분도 내가 일본어 강사가 되었다는 걸 신기해하셨다)
영어나 술이나 지금에 와서 대단한 결과를 바라는 건 아니다. 시장에 가서 가격을 물어보는 걸 넘어 처음 보는 과일이나 채소를 보면 무엇인지 재배는 어떻게 하며 요리는 어찌하는 것인지 같은 얘기를 나누다, 사는 얘기를 조금 깊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낯선 여행지의 도미토리 숙소에서 각자의 여행 경험을 들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공감도 하고 당부도 하며 밤늦도록 여행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거기다 가볍게 술잔이라도 부딪힐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영어에서 자유하고 싶다. 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근데 생각해 보면 ‘자유하다’는 것은 자유롭게 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잘하든 못하든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하지 못해도 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고 장벽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가를 꿈꾸면서 완벽을 추구하며 고민한다는 것은 여행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위를 하더라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매일 영어 단어 20개를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마닐라 인근 다스마라나스 채소 과일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