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by 다섯시의남자

1986년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무위키에 1986년을 검색하면 이렇게 시작된다.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이 해에는 비극적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국내에서는.....‘


‘수요일로 시작한다’는 정보가 무심하게 첫 줄에 나온다. 그 해에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다음 해에 공군에 입대할 때까지 최루탄 연기와 함께 생활했다.(사실은 피해 다녔다) 휴강 메시지는 예고 없이 수시로 칠판에 적혔고, 휴강이 아니더라도 강의실 근처로는 어차피 가지 않았다.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프로야구를 보려고 두 시간씩 줄을 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놀았다. 신나게 논 것도 아니고 그냥 대학에 입학하면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심심하게 놀았던 것 같다.


나는 86학번이다. 나이를 얘기하기보다 학번을 얘기하는 편이다. 7살에 입학을 해서 그렇다. 나이로 하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얘기는 88서울 올림픽도 열리기 전인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다. 나에게는 바로 얼마 전에 입학하고, 군대를 가고, 그녀에게 편지를 쓴 것 같은데. 이제는 아주 오래된 얘기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러면서 살짝 서글프다.


20년쯤 지나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또 그만큼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다양한 이력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은 글을 쓴다. 다른 일도 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이력을 얘기하자니 갑자기 다양하게 만들었던 명함 생각이 난다. 이미 쓸모 없어진 명함을 버리는 일은 고민거리다. 쓰레기봉투에서 혹시라도 튀어나와 돌아다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불에 태우는 게 제일 확실한데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번거롭다.

글을 쓰면 더 이상 명함이 바뀔 일이 없다. 죽을 때까지 뭔가를 계속 쓰고 있으면 쓰는 동안에는 그 명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작가는 글을 쓰는 한 은퇴가 없다’는 말을 어느 작가가 했다.) 아직 그런 명함을 만들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만들어 사용할 예정이다.


오래 살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살펴보고 싶다는 것이다. 2020년에 살아온 인생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2021년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작업을 했다. 이 두 번의 깊은 사유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내 후반전 인생의 표지가 되었다. 생각을 글로 옮기고 공개하기까지는 힘든 과정을 반복했다. 가장 먼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중년이라면 누구나 이전까지의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십 년쯤 살았으면 책 한 권 쓸 분량의 이야기는 있지 않겠나. 출간을 하고 말고는 본인의 뜻이겠지만 기록을 하는 것은 명백히 필요한 일이다.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다. 기록하고 정리하면 어떻게 걸어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보인다.

책을 쓴다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 <출간 기획서>다. 기획서에는 ‘왜 책을 쓰려고 하는가?’를 먼저 진술해야 한다. 이것부터 시작한다. 왜 책을 쓰려고 하는가?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이 책은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나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두고 나는 솔직한 답을 기다린다. 그 과정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고 나의 민낯을 대면하게 한다.


86년도에 대학을 가기까지 긴 시간 학창 시절을 보냈다. 졸업을 하고는 무슨 일을 하고 살고 있더라도 여전히 따라다니는 게 그놈의 ‘전공’이다. 개론조차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 분야에 있어 전공자인 것이다. 그토록 중요한 대학을 입학한 사건처럼, 두 번째 인생에도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전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진짜 전공을 살려 남은 인생을 살아내게 된다.


1986년에는 성적만 갖고 눈치 지원을 했다. 여러 개의 지원서를 들고 현장에서 경쟁률을 살피면서 엄청난 작전을 수행해 대학에 들어갔다. 전공에는 내 의지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인생 전반전을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았다.

지금 후반전 앞에서 지원서를 들고 있는 중년이 있다면 최소한 봉투를 열어 내가 어디를 지원하는지는 알아보라고 하고 싶다. 그저 하던 대로 하다가는 살던 대로 살게 될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 궁금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무수한 갈림길이 있고 그 가운데 신나는 길들이 열려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으면 좋겠다.


한 20년쯤 지난 어느 날, ‘2022년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 인생이 이렇게 드라마틱 하고 신날까?’ 돌아보게 되는 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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