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만 세 개다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봤다.
사물이 흐릿해졌다. 창밖을 한참 보고 있는데도 회복이 더디다. 지난번 책을 쓰고부터 심해졌다. 오래 책을 보고 있거나,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점점 글씨가 퍼지면서 눈을 더 찌푸리게 된다.
안되겠다 싶어 가방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돋보기는 세 개를 샀다. 집에 하나, 놀이터에 하나, 가방에 하나.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없을 때는 하는 수 없다. 눈이 더 나빠진대도 어쩔 수 없다. 마감은 다가오고 불안한 마음에 진도는 생각만큼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코끝에 걸고 모니터를 향해 눈을 깐다. 앞을 볼 때면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면 된다. 돋보기 위로 눈을 뜨고 앞사람을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할아버지들이나 하던 행동이라 생각했다. TV를 보면 대개 신문을 읽다 눈을 드는 그런 설정...
장난처럼 하던 행동이 이제는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그나마 나는 평소 안경을 끼지 않으니 다행이다. 안경을 끼는 친구는 돋보기까지 해서 두 개를 쌍권총 차듯 차고 다닌다. 익숙한 듯 불편 해 하지도 않는다.
한 이십 년쯤 지나면 보청기를 알아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자기 전에 틀니를 빼서 머리맡에 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하기 싫은데도 그 모습이 그려진다.
청바지를 입고 티셔츠 차림으로 백팩을 메고 젊게 다니더라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 있다. 물론 무조건 숨기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나이 들어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 복장으로나마 위안을 삼고 심었겠지.
돋보기나 틀니나 보청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 불편할 뿐 다른 의미는 없다. 혹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들고도 세월 속에서 배운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 늙는 것이다. 세월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나이 듦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TV 리모컨 작동이 어려워 새벽에 아들네로 전화할 수는 있지만 어른으로서 삶의 지혜가 없고, 인생의 현명한 판단이 무뎌진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적 혈기를 버리지 못하고 감정대로 행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게 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돋보기 낀 모습을 처음 본 선생님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탄식 소리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이다. 괜찮다. 돋보기는 그냥 안경일 뿐이고,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중년으로 잘 살고 있다. 당당하고 멋진 어른이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