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동에 부착한 선거 현수막. 시안도 여러번 고치고 문구도 고심 끝에 결정했다. 유동인구가 많고 가시성이 좋아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공천이 확정되기 전 예비후보 신분으로서 가장 시급했던 일이 선거사무실을 구하는 일이었다. 사무업무 공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선거법상 선관위에 등록을 마친 사무실 외벽에만 후보자의 사진을 담은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어서다. 정치 초년생으로서 한시라도 빨리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는 곳이 사무실로 제한되지만 않았다면 굳이 돈을 들여 선거사무실을 임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역구 현장 다니기도 바쁜데 실내에서 내 손님(집토끼) 맞이하기엔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안산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역구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되어있었는데, 문제는 선택이었다. 교차로 같은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현수막을 게시해야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곳의 사무실은 입지상 가격도 가격이지만, 공실도 많이 없을뿐더러 선뜻 임대를 해주려는 곳도 많지 않았다.
임대인 입장에서 단기임대가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현수막 설치 시 외벽에 고정을 위해 구멍을 뚫게 되면 물이 새는 경우도 종종 있어 싫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을 확인하고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고, 선거법상 계약서가 첨부되는 등 제반 의무 이행 사안도 많아 꺼리는 임대인도 많았다. 같은 지역구를 두고 기초의원(시의원) 후보들도 같은 차원에 고민을 하기 때문에 원하는 위치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선거사무를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사무실의 기능은 차치하고 순전히 입지 조건만으로 결정해야 했다. 최종 계약한 곳도 손님을 맞이하거나 행정업무를 볼 수 있는 사무실로서의 기능은 구현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입지 선택 기준은 이랬다. 우선, 선거인 수가 초지동(약 4만여 명)이 고잔동(약 2만여 명)에 비해 2배 많았기 때문에 고잔동보다 초지동을 선택했다. 초지동은 10개의 아파트단지로 구성된 신도시 지역과 시민시장을 거점으로 한 초지역 상권으로 나뉘지만, 유동 인구가 많고 타 지역 유권자와 섞이지 않는 신도시 지역을 택했다.
이후 사거리에 위치한 중심 상권 중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을 4곳으로 압축했다. 문제는 마음에 든 해당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선거사무실로 내주기를 이내 거절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인데, 현수막 하나 붙이기에 이렇게 까다로운 일인지 몰랐다. 이마저도 당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할 땐 출마하기조차 쉽지 않은 환경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던 중 다행히도 내가 원했던 위치에 선뜻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임차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청년이 직접 발로 뛰며 열심히 한다고 좋게 봐주신 한 사장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선거사무실을 얻게 됐다. 사무실 통유리를 4개나 가리는 조건이었지만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물론, 단기 임대를 해야 하는 만큼 시세보다 웃돈을 줘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 사장님도 나와 같은 당을 지지하는 분이기에 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크레인을 사용해 현수막이 게시됐을 때 한고비 넘겼다는 뿌듯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나름에 좋은 위치에 현수막을 가장 빨리 그리고 크게 내걸었던 점을 꼽고 싶다. 약 두 달여의 시간 동안 해당 지역을 오고 갔다면 아마도 내 얼굴을 못 보고 지나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현수막에 들어갈 문구도 하나하나 꼼꼼히 정했다. 혹자는 왜 조세일보 경제부 기자라는 점을 어필하지 않았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는 순전히 내 의견이었다.
그나마도 해당 위치에 현수막을 걸지 못했다면 나는 더더욱 표 차이에서 밀렸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가뜩이나 대선에 비해 선거 관심도는 떨어지는데 그래도 인물이 좋다고, 저 사람 안다고, 이름을 기억하고 사진을 찍자는 분들도 생기고 했던 것이 그 반증이다.
기성 정치인들은 사실 경제력이나 인맥 등에서 앞서나가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 어려움도 적을 것이라고 본다.
돌아보면 선거운동 과정에서 운이 여러 번 따라줬지만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던 것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품을 팔아야 했던 일이 힘들면서도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