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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bean Jul 24. 2019

아마도 쇼핑 중독증 ? (1)

1년 6개월 여 동안의 일탈


 나는 어차피 할 수 없다면 아예 외면해 버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내 마론인형이 생기기 전까지 인형놀이를 하기 싫어했다. 게다가 어차피 꾸밀 수 없다면, 그냥 남자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창 사춘기일 때에 박스티에 힙합바지만 입고 다녔다. 고 3이 되자마자, 공부에 열중하겠다고 머리카락을 짧은 커트로 자르기도 했다. 그때 당시에 나는 운동장에서 체조를 할 때마다 짧은 머리카락이 팔랑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어느 날엔가는 버스 안에서 여학생 두 명이 나를 보며 성별이 궁금해서 소곤거리는 대화를 짐짓 모르는 척 들으면서, 잔잔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초까지, 비교적 짧은 머리에 힙합 패션을 고수했다. 어쩌다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옷차림이 달라지긴 했었지만, 잠시 치마를 입었을 뿐,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그나마 보통의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는 정도로 무난하게 지냈다.


 연애를 오래 하다가 결혼을 하고, 서른한 살에 딸을 낳았다. 갓난아기를 키울 때에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다닐 수가 없었다. 늘 모유가 배어있는 수유복과 움직이기 편한 쫄바지 위주로 입은 채, 거의 집에서 아기와 둘이서 보냈다. 수시로 울어 제치는 아이를 재우려고 밖에 나갈 때면, 카디건을 입거나 아기띠만 메어도 배어있는 모유를 가릴 수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는 물론이고, 심적인 여유도 없는 시절이었다.


 사실 요즘 젊은 엄마들을 보면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제법 잘 꾸미며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애초에 외모를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는 성향인 데다 주변에 바로 아이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더더욱 '나는 애엄마입니다'하는 티를 내고 다녔던 것이다. 아이를 낳은 첫 해에는 아파트 베란다 큰 창 밖으로 보이는 벚꽃나무들의 만개한 꽃들을 바라보며 우울감을 느낄 정도로 외출을 거의 하지도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육아'라는 일은 내 역량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가 같이 울기도 하면서 신생아 육아라는 큰 산을 넘었다.




 다른 집 아이는 금방 금방 커도 내 아이는 참 더디게 큰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어느덧 아이는 36개월을 넘겼고, 그 이후로는 점점 수월해졌다. '이제는 살 만하구나' 하고 느낀 순간부터 나는 옷을 사는 일에 심취했다. 심지어 평범한 것은 마음에 차지가 않아서, 주로 에스닉한 스타일의 옷을 파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특이한 옷들을 많이 구입했다. 당시에는 꽃무늬와 패치 무늬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단지 옷뿐만이 아니라 몸에 걸치는 모든 것들이 부족하게 느껴져서, 점차 팔찌, 목걸이, 신발, 가방 등의 잡화들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 비싸지 않은 것들이어도 개수가 많아서 지출이 꽤 있었다. 전업주부로서, 생활비에서 생필품이 아닌 일반 소비재에 상당한 지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달에는 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다음 달이 되면 어느새 옷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다. 밀려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내가 택한 방법은 장바구니에 옷을 담아놓고는 삭제했다가 다시 담으면서, 신중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재차 고민하는 거였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매 품목마다 여러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지를 검토했다. 정말 나에게 쓸모가 있을지, 가격이 적당한지, 내 몸에 어울리는지, 내 마음에 얼마나 드는지 등 나름대로 오랜 고민 끝에 확정한 것들을 구매해나갔다. 택배비가 붙느냐 아니냐도 장바구니의 최종 품목을 결정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내가 쇼핑 중독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를 고민하면서 한 달 한 달을 넘기다 보니, 드디어 끝이 보이기는 했다. 1년 6개월 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느낌이 든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서도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우선 미세하게 바뀌는 계절감에 따라 새로 나온 옷들을 바로 입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입을 옷을 고를 때마다 어떤 식으로 받쳐 입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꽤나 흥미진진했다. 날마다 정해놓은 몇 개의 사이트를 순회하면서 신상옷들을 눈으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쇼핑 그 자체에 대한 설렘과 택배가 올 때의 기쁨과 새 옷을 입을 때의 즐거움이 모두 좋았다. 쇼핑을 지속할수록 늘어나는 물품들에 맞춰서 화장대와 옷장을 정리해 나갔는데, 가구에 그득한 예쁜 것들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마음 한편이 뿌듯해졌다. 하물며 그것들을 직접 착용할 때의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특하게 예뻐서 제법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면, 온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지금도 내 옷장에는 에스닉한 긴치마들이 많이 걸려 있다. 이제는 밖에 입고 나가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집 안에서 입기에는 너무 불편한 그 옷들을 누군가에게 주지도 못한 채 묵혀두고 있다. 아직까지는 헌옷함에 버릴 정도로 마음이 뜨지는 않아서, 누군가가 선뜻 받아가겠다고 하기 전까지 이 옷들은 내 옷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새로 나온 옷을 몇 개씩만 사고 있다. 한창 쇼핑에 빠져있을 때의 경험으로, 지금은 조금 더 명확한 기준으로 옷을 고를 수 있게 됐다. 이제는 꽃무늬와 패치 무늬 대신 좀 더 나이에 맞으면서 편한 옷 위주로 산다. 그리고 마음에 들더라도 평소에 내가 손대지 않을 만한 스타일은 애초에 장바구니에 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맞으니까 편하고 손이 가는 옷들 중에서 보다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고르는 일은 지금도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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