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니셨다. 독실한 신자였다기보다는 의지할 곳을 찾아 기도하기 위해 가는 거였다. 교회에서 아무리 수요예배와 금요예배에 나오라고 전화를 해도 부모님은 거의 가지 않으셨다.
내가 여섯 살 때였을 것이다. 그날은 아버지 없이 엄마만 양쪽에 우리 손을 하나씩 잡고 교회에 가기 위해 나왔다. 아파트 입구 앞에 서 있던 어떤 중년 여성분이 근처에 있는 교회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당시 우리 아파트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중간에 있었는데, 그 교회는 언덕의 꼭대기 부분에 있었다. 엄마는 다니는 교회가 있다고 거절을 했고, 그분은 전략을 바꿔서 나를 붙잡고 오늘 과자를 주는 날이니 가자고 말씀하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교회는 너무 낯설고, 과자는 먹고 싶었다. 엄마는 나에게 가고 싶냐고 몇 번 묻더니, 내 손을 놔 버렸다. 그분은 내 손을 잡고 홍보하던 교회로 데리고 갔고, 엄마와 언니는 다니던 교회로 갔다.
낯선 곳에 혼자 가서 어색하고 뻘쭘했지만, 은박접시에 색종이 같은 걸 붙이면서 좀 나아졌던 것 같다. 과자를 먹긴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고, 교회에서 나올 때쯤에 기분이 꽤 좋았었다. 좋은 기분으로 언덕을 내려오는데, 엄마와 언니가 저 밑에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나만 따로 갔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네가 그 교회에 따라갔잖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초등학생일 때에 학교에서 말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반 친구는 '네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을 한 번 해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일 년에 거의 한두 명의 단짝 하고만 친하게 지냈고, 그 외에 다른 아이들에게는 낯을 많이 가렸다. 하지만 그 단짝에게조차도 뭔가를 부탁하기가 힘들어서 준비물이 필요할 때에 빌려달라는 간단한 말마저도 하지 못했다. 준비물을 안 챙겨서 수업 시간에 주목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누군가에게 잠깐만 빌려달라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으므로 점차 많은 준비물을 스스로 챙겨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없는 미술시간에 필요한 가위와 풀 같은 것도 매일 들고 다녔고, 4학년 때부터 사용하게 된 '사회과 부도'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전업주부였어도 갑자기 비가 내릴 때에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므로 우산도 매일 들고 다녔다. 웬만한 교과서도 많이 들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가방 안에 잘 있는지 번호를 매겨서 확인하고는 했다. 엄마가 챙겨주지도 않고, 어느새 내 책임이 되어 있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한 불안감이 커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아침 7시에 알람도 없이 스스로 일어나서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그 일은 친척 어른들에게 칭찬거리가 되었고, 칭찬을 듣는 일은 기분이 좋았었다. 어느 날엔가는 사회 수업 시간에 유일하게 '사회과 부도'를 챙긴 학생이어서 선생님의 공개적인 칭찬을 들은 일도 있었다. 이 일은 그동안 준비물을 챙긴 수고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기뻤다.
그런 이미지 덕분인지,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담임 선생님이 내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며 반 아이들한테서 걷은 학급비 같은 것을 나에게 맡겼다. 그런데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급식실에 갈 때도 꼭 지닌 채 다니다가 그만 급식실에 가던 길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히려 조금만 신경을 덜 썼다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돈을 메꾸게 된 일이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내 습관을 바꾸는 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방 안에 있는 준비물들을 번호까지 매겨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잘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은 고등학생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번호를 매기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준비물들을 가지고 다닌다. 육아를 하면서 당연히 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영아기 때는 그렇다 치고, 초등학생 딸을 둔 현재 내 가방 안에 손톱깎이, 머리끈, 연고, 자운고, 알로에 크림, 대일밴드, 손거울, 휴지, 물티슈는 기본 옵션이다. 여행을 갈 때는 해열제, 체온계, 백초, 설사약 같은 것들을 더 챙긴다.
딸아이가 유아기였을 때, 딸은 외출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가방에다 장난감을 가득 넣었다. 문을 나서기 전부터 '네 가방은 끝까지 네가 들어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해놓고 나와도, 아이는 금세 무겁다고 가방을 나에게 벗어던지고 가기 일쑤였다. 나는 딸의 가방을 땅바닥으로 던지면서 "버릴 거야"라고 말했다. 딸은 울었다. 내가 주워다 딸에게 주면 딸은 자신이 짐을 들고 갔다.
내가 위협적으로 "버릴 거야" 했던 말을 고작 유아였던 딸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알람 없이도 오전 7시에 번쩍 눈을 떠서 알아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어쩌다 필요했던 준비물까지도 양어깨가 무겁게 챙겨 다녔던 나로서는 딸아이가 내맡기는 짐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아이가 부당한 것이 아니고, 엄마를 향한 것이었어야 할 눌러놓은 원망이 엉뚱한 방향으로 일부 표출되고 있다는 진실을.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학원에서 하원 하면서, 자신을 데리러 오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그 가방을 별 저항 없이 받아서 한쪽 어깨에 멘다. 딸아이는 알까? 내가 나의 엄마와 나의 딸 양쪽으로 인내하고 있는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이게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먼저 내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준비물을 가끔씩 잊어버리기도 하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