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가방을 메고 가까운 동네 서점을 향해 걸었어. 요즘에는 책도 안 읽히고 글도 안 써져. 몇 줄 쓰는 게 힘들어서 좋은 일이 생겨도 인스타그램 업데이트를 미루기만 할 만큼.
오늘은 김해에 미팅을 다녀왔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일 이야기를 나누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고. 집에 도착해서 가장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만 침대에 누웠어. 눈을 깜박깜박거리며 천장을 쳐다봤다가, 다시 휴대폰 시계를 봤다가. 할 일을 떠올렸어. 아이들이 모두 하교하기 전에 다음 방송의 자막을 완성하고, 출연자 섭외도 해야 하는데. 일 분, 또 일 분 시간이 가는 걸 보고만 있다가,
‘놀자’
생각했어. 다 미루고 좋아하는 공간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넓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도 한 권 사 오자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철근같이 무겁게 느껴졌던 몸이 놀자고 마음먹으니 둥둥 떠오를 것처럼 가벼워졌어.
양말을 신고, 점퍼를 꺼내 입었어. 혹시라도 오늘은 써질지 모르는 글을 위해 노트북도 챙겨 나왔지. 놀기로 해놓고는 또 무언갈 쓸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습긴 한데 암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주변에는 ‘탈덕’했다고 밝힌 아이돌의 노래를 들었어.
나의 구 최애는 마약 투약 혐의로 팀에서 탈퇴했어. 죄는 최애가 지었는데 동정은 왜 내가 받았을까. 죄는 최애가 지었는데, 술은 왜 내가 퍼마셨을까.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냉장고에 붙어있던 슬로건을 떼냈어. 모두가 지탄하는 연예인을 응원한다고 가족이 사용하는 냉장고에 붙여 둘 순 없으니까.
그때, 지켜보고 있던 아영이 말했지.
“언니... 어떻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해요... 조금 있다가 떼내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아영을 바라봤지. 그렇게 해서 [**아 응원할게]라고 적힌 슬로건은 며칠 더 냉장고 자리를 보전하게 됐어. 사람들은 내 앞에서 더는 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지만 난 지금도 구 최애의 노래를 즐겨 들어. 에어팟만 귀에 꽂으면 아무에게도 취향을 들킬 일이 없으니까 들킬 일도 없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고 나서야 피가 제대로 통해’
워러풀워러풀, 랩을 속으로 따라 부르며 걷다 보면 금세 얼룩 고양이가 반기는 책방이야. 시원한 라떼 한 잔을 주문해두고, 노트북을 열어 글을 써. 세상에 알려져도 무방한 작고 작은 비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