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은 있다

by 수미


아영이 아일랜드에 가서 살고 싶다고 처음 고백한 날을 기억한다. 평소처럼 아영의 집에서 잘 구운 한치를 뜯어먹으며 맥주를 마시던 밤이었다. 안주 없이도 맥주를 잘 마시는 아영이지만, 나를 초대할 때면 특별히 냉동실에서 한치를 꺼냈다. 가스레인지 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한치의 냄새가 나면 맥주 맛에 대한 기대도 올라갔다.


아영은 잘 구운 한치 몸통은 밀어 두고 다리부터 먹으며 말을 꺼냈다.


“제가 밤마다 영어 공부하는 이유 말이에요, 아일랜드에 가기 위해서예요. 거기서 살아보려고.”


아영이 매일 밤 영어공부를 한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침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돌보고 나면 응당 누워야 하는 게 아닌가. 눕기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눕기를 사랑하는 내게 아영의 공부는 늘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영어 원서로 된 소설을 읽거나 미드를 자막 없이 보는 아영을 보면서 막연히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민이라니.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일랜드라고요?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발음해 봐도 생경한 말이었다. 태어나서 해외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으로 갔던 필리핀 세부와 가족 여행으로 간 일본 도쿄가 다였던 나는 외국에 대한 어떤 로망도 없었다. 먼 관광지보다는 동네에서 즐기는 산책이 좋았다. 언제나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선호하는 나는 새로운 카페보다는 사장님과 인사를 나눌 정도의 친분이 쌓인 카페가 좋았다. 낯선 여행지를 탐험하는 기쁨,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보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편안함이 더 좋았다. 그런 나에게 외국에서 살기란 이를테면 완전한 타인의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저 가슴이 너무 뛰어요, 아영 씨.”


나는 한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며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 계획에 이토록 세차게 심장이 뛰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아영이 여권을 들고 아일랜드 공항 입국심사대에 서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가슴이 아릿할 만큼 흥분됐다. 아영의 말에는 강력한 실행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을 배울 거예요,라고 말하면 수영장에 등록했고 요리를 배우려고요 말한 뒤에는 요리 학원에 등록해 한식 중식 양식 자격증을 땄다. 그러니까 아영은 언젠가 꼭 아일랜드에 갈 것 같았다. 그리고 아영은 2년 후, 정말 아일랜드로 떠났다.


아일랜드.

유럽 대륙의 서쪽 끝자락에 붙은 섬나라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기근•가난•이민•해외 이산 등의 쓰라린 슬픔과 한이 어려있는 나라. 근 750년 동안 영국의 식민 통치에 맞서 독립과 자존을 추구해 왔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뤄냄으로써 ‘켈트 호랑이’로 포효하고 있는 작지만 강한 나라.

《아일랜드 역사 다이제스트 100》 p15, 한일동, 가람기획


아영은 떠나기 전 《아일랜드 역사 다이제스트 100》이라는 제목의 책을 건넸다. 아일랜드 가서 살려면 그 나라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해서 읽은 책이라고. 이제 자기에게 필요 없다며 내게 쥐어 주었다. 마치 릴레이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듯이. 나는 하루에 한두 페이지씩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일랜드가 어떤 나라인지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의 풍광이 그려진 책표지를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아영이 주고 간 책은 한동안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오가며 책을 편하게 넘겨볼 수 있게. 생경하기만 했던 아일랜드가 그렇게 점차 일상의 언어로 느껴졌다.


나는 아일랜드에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강구했다. 그즈음 나의 고민을 들은 참미작가는 말했다.


“작가님, 쿠팡 가요.”


참미 작가는 첫 책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를 출간하고 작가이자 러너, 책방지기로 살고 있었다. 그가 동생과 운영하는 오누이 책방은 내가 수시로 가서 글을 쓰는 작업실이었다. 우리는 때로 단골 카페의 비스코티를 나눠 먹기도 했고, 함께 독서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문화예술 사업 축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거나 일거리가 없어서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에는 실패가 없다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지속하려면 적어도 얼마의 돈이 필요했으니까.


“쿠팡이요? 물류센터에서 포장하고 물건 옮기는 일 말하는 거죠?”

“네. 한참 코로나 심할 때 있잖아요. 그때 창원 화가들 쿠팡 많이 갔어요. 일당 받아서 책방에서 치킨 시켜 먹고 그랬어요.”


책방에 옹기종기 모여 뜨끈뜨끈한 치킨을 나눠 먹는 화가들을 생각했다. 하루 그림을 그린다고 돈이 뚝딱 생기는 건 아니지만 물류센터에서 일하면 분명한 수입이 생겼을 것이다. 일터에서 시간을 보낸 만큼 돈이 생기는 세계를 접한 어떤 화가들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쿠팡은 일당이 얼마예요?”

“팔만 원인가?”

“괜찮네요.”


당시 연재하던 신문 칼럼 한 편의 원고료가 사만 원이었다. 나는 칼럼 한 편을 쓰기 위해 오래 골머리를 앓았다. 커피값만 삼만 원을 쓰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하루 일당 팔만 원이라는 쿠팡이 괜찮아 보였다. 참미 작가는 누구나 신청하면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별다른 자격도 필요 없었다. 신입일 경우에는 교육비까지 포함해서 조금 더 많은 돈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도 글 쓰는 일 외에도 대안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우리는 쿠팡이라는 일터가 있음에 함께 안도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 ‘8’이라는 숫자를 썼다.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 쿠팡을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주일에 두 번이면 십육만 원, 4주면 육십사만 원을 벌 수 있었다. 넉 달만 일하면 아일랜드 비행기 티켓 값은 거뜬히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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