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서 돌아와 우리가 향한 곳은 런던이었다. 몸은 하루쯤 제발 쉬자고 절규하고 있었으나 욕망은 어느새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도착한 우리는 한 시간도 둘러보지 못하고 관람 대신 휴식을 택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만큼 지쳤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한참을 앞만 보고 있다가 나는 아영에게 물었다. 누적된 피로 때문일까. 평소라면 의지로 참았을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다.
“아영 씨,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까요?”
나는 아일랜드에 머무는 동안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지냈다. 이 여행에 끝이 있다는 걸 굳이 짐작하고 슬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가 되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였다. 아영은 여전히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2년 만에 만났으니까...”
다시 2년 후에 만나지 않을까요? 아영의 대답에는 희미한 웃음이 묻어났다. 나는 2년 후라는 말을 되새겼다. 아영은 같이 살자고 더 말하지도 않았지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애틋하고 고마웠다. 나를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음식점에서 칭다오맥주와 볶음면을 먹었다. 맥주는 영혼의 윤활유가 분명했다.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피로회복제였다. 식당에선 케이팝이 계속 흘러나왔고, 눈앞에는 아영이 있고,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자니 마치 인천이나 부산의 차이나타운에 있는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술기운에 나는 몇 가지 약속을 호기롭게 했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또 만날지 모를 일이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공부도 하고 글쓰기가 아닌 다른 기술도 배우겠다고 말이다. 좋아요, 언니. 아영이 웃었다. 그리고 칭다오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맥주 한 병은 언제나 너무 적었다.
창원으로 돌아온 나는 아영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법 의욕적으로 살았다. 한 달 정도는.
먼저 디제잉 수업에 등록했다. 어나더 러브 스토리 페스티벌에서 본 디제잉 공연이 안겨준 욕망이었다. 나는 한글로 글 쓰는 작가보다 전기와 컨트롤러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는 DJ가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박자에 맞춰 버튼 누르기라는 기본적인 사용법도 완수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리듬감도 연습하면 는다고 독려했지만 어느새 심각한 표정으로 1초 빠르거나 느린 나의 손가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리듬감보다 귀의 문제였다. 디제잉은 1초가 어긋나도 믹싱의 밸런스가 어긋났는데 내가 듣기에는 전혀 문제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듣기 좋았다는 것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동네 카페 사장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카페마다 자동화가 잘 되어있는 데다가 머신도 다 달라서 굳이 자격증을 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돈 주고 자격증 따지 말고 카페에서 알바하면서 라테아트를 연습해 보는 게 더 좋을 거라 권했다. 혼자서 영어 공부가 자신 없어서 인근 대학교 평생 교육원 영어기초회화 수업을 등록하기도 했다. 주로 노년층의 학생들이 주를 이뤘고 강사님의 연세도 비슷해 보였다. 사투리의 악센트가 강한 분이었는데 때때로 ‘스윗’을 ‘서윗’으로 발음하셨다. “What’s wrong?”의 ‘wrong’ 발음을 우렁이의 ‘렁’이라고 예시를 들기도 했다. 매일 노트에 쓸 이야기가 넘쳐나는 수업이었지만 암기 위주의 회화수업에선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익숙한 맛과 언어와 냄새의 세상에 쉽게 적응했다. 근처 시장에서 제철 야채를 사서 밥 해 먹는 재미도 여전했고, 강연과 글쓰기 수업도 간간이 했다. 한글로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의욕적으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다. 집에서 만든 뱅쇼로 쌍둥이 아들을 취하게 했으며, 비상계엄 사태로 집회에 나갔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감자탕 만들기 고수가 됐으며, 숏츠형 시트콤 대본을 썼고, 요가 수업을 들었다.
여전히 한두 달에 한 번씩 아영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아영은 혼자서 그랜드 브라더스의 독일 콘서트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매주 가게에서 새로운 샐러드를 만들고 퇴근 후에는 수영을 했다. 아영의 두 아이도 잘 지내고 있었다. 아들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딸은 수영대회에 나가 거듭 금메달을 땄다. 유라와 마이클은 부산여행을 와서 남포동에서 만나기도 했다.
다시 계절을 돌아 여름을 맞이했을 때 향수병처럼 아일랜드가 그리웠다. 비 오는 우중충한 날이면 아일랜드 생각이 간절했다. 시간이란 마법이 고생은 싹 지우고 그리움만 남긴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글을 썼다. 쓰다 보면 다시 떠나고 싶은 열망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도 아닌 나로부터. 아영이 그리울 때면 오아시스의 ‘월더월’을 들었다. 언젠가 아영이 친구에게 우리 사이를 설명해 줬을 때, ‘원더월’ 같은 관계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원더월’은 선망의 대상 혹은 구원자. 또는 정의할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나는 세 번째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정의할 수 없는 관계. 우리의 우정은 원더월이었다.
어느 해보다 길게 느껴졌던 더위가 지나가고, 아영의 메시지가 운명처럼 도착했다. 나의 아일랜드 여행기가 또 다른 여행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기대를 담은 메시지였다. 그리고 추신처럼 덧붙인 말이 있었다.
언니, 독일 클럽이 그렇게 좋대요.
독일 클럽. 네 글자에 심장이 요동쳤다. 다음 만남의 목적지가 명쾌하게 결정된 순간이었다. 아영은 독일 맥주가 기가 막히다고 결정적 킥을 날렸다. 이미 머릿속에 ‘구덴탁!’(독일의 인사말)을 외치며 베를린의 클럽에서 맥주를 주문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또 어떤 개고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