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울라’는 말은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을 읽고

by 안현아

가을비가 세차게 내린다. 그림자처럼 검게 그늘진 인파가 지나간다. 활짝 펴진 우산 속에서 누가 울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어깨가 흔들린다. 흐느끼는지 웃고 있는지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한참 밖을 응시하다가 너를 본다. 내가 없는 곳에 갇힌 너를 밖으로 끌고 나오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아서 지켜보기만 한다. 비에 젖어도 녹지 않는 우울이 있다. 어쩌면 씻겨 나가지 못한 부스러기가 너를 지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너는 그것을 양분 삼아 자라나다 이내 꺾이고 다시 잠들어 막힌 숨을 몰아쉬다 자지러진다. 나는 네 몸에서 우울이 빠져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한다. 악취를 풍기며 곁을 맴도는 찌꺼기가 사람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겪어봐서 안다. 나는 그 우울이 싫다. 너와 함께해서, 너를 잡아먹어서, 너의 하루를 빼앗아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은 자꾸만 커져서 네 옆자리를 훔쳐 간다. 뒤로 밀려난 나는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너를 안아주는 사람이 옆이 아닌 뒤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손을 뻗는다. 여전히 너는 그 자리에 서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괜찮다고 등을 다독거린다. 너는 너만으로도 벅차서 나를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무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려고 해도 검붉은 점성이 뜻대로 너를 놔두지 않는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너의 발목을 잡고 무너뜨린다.

비가 내리고 짙은 어둠과 자동차 소음만이 들리는 이곳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들은 너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훈수를 두고 괜한 모진 말로 너를 상처 입힌다.

겨우 발을 뗀 너는 구석으로 가 혼자 울고 있다. 하염없이 우는 너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여전히 너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볼 거라고 믿으며 네 앞에 쭈그려 앉는다. 나는 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내 손을 잡길 기다린다. 어떤 이의 성급한 말로 상처받더라도 너를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너와 나 사이에 시차가 있어 네 삶은 내가 사는 세상보다 좀 더 느리게 간다. 하루가 더디게 간다고 혼잣말하는 네게 나는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비는 멈출 기세도 없이 내리고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다. 빗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뒤섞여 들려오는 소리인지 모를 흐느낌이 목전에 닿는다.

구석의 구석까지 간 너의 몸부림을 기억한다. 더 나아지려고 평생 발버둥 치는 사람의 몸짓은 얼마나 버겁게 느껴지는지 나는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불러서 뛰쳐나간 적이 있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외침은 옆에서 부르는 것처럼 가까이 들려온다. 너는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다.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높이의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뱉은 말에 나는 처음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환히 웃었다. 먼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늘이 아닌 햇볕을 맞으며 웃는 너를 볼 수도 있겠지. 내 오랜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소원한다.






이제니,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울고 있는 사람」 인용 (2019, 현대문학)



글쓴이: 현아 (https://instagram.com/withst4nd)

편집자: 민지

2023.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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