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것과 이겨내는 것의 차이
저 멀리, 주위의 색깔을 모두 잡아먹는 검은 점이 보인다. 점은 가만히 웅크려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말들에 둘러싸여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돌처럼 박혀 있다.
한 번쯤 움직일 법도 한데 점은 커질 생각도 줄어들 생각도 하지 않고 점으로만 존재한다. 태초부터 점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움직임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처럼. 점은 길 한가운데 처박혀 일어나지 않는다.
점은 그저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건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오랜 시간 동안 갇혀있다는 것이다.
둥근 구의 형태로 모인 점에 가까이 다가간다. 똑바로 응시할수록 점은 검은빛의 파장을 일으키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작은 점이 움직이길 바라는 사람과 이대로 굳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중첩되어 다가와 주변을 둘러싼다. 원하지 않을 때도 견디라고 등을 떠미는 것들이 점차 늘어난다.
견디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상황을 이 악물고 버티는 느낌이다.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순수한 흑점은 표정을 지우고 홀로 작은 몸을 말아 누워 있다. 네가 던지는 말로부터, 네가 던지는 비난과 힐난으로부터,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한기로부터 엎드린 채 견뎌내고 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곳에 있는 점을 깨우는 사람은 없다.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언제까지? 길이 열릴 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 어디에 길이 생긴다는 거지?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고요하게 계속 흘러간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끊어지지 않은 채, 천천히 번지며 주위를 갉아먹던 새까만 점이 마침내 고개를 든다. 흐트러진 파장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돌아오는 순간에 더 가까워진 점은 점이 아닌 내가 된다.
나는 점이다. 나는 작게 흩어진 흑점이었다가 파장을 일으키는 몸부림이었다가 표정을 지운 채 나를 응시하는 나 자신이다.
점이었던 내가 조금씩 움직인다.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이제 그만할 때라고 생각해서, 다신 견디고 싶지 않아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소망만 한다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숨을 내뱉는다. 내 몸이 커졌다 다시 작아진다. 숨을 쉴 때마다 생기가 되살아난다. 하릴없이 견디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와 잘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들과 취향, 일상을 놓쳐버린다. 돌아가는 일은 시작하는 일보다 배는 어려워서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만 견디자는 말을 누가 먼저 꺼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는 일어선다.
견딘다는 말보다 이겨낸다는 말이 더 좋다. 내가 힘내서 극복했다는 소리니까. 마모되지 않고 이겨내서 이 자리에서 너를 보고 있다고, 네가 내뱉던 힐난은 나를 견디게 하였지만 끝내 이겨낼 수 있는 거였다고 그렇게 외칠 수 있으니까.
나를 잃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와야지. 이겨내고 걸어 나온 나를 안아줘야지.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만 견디고 이 순간을 이겨낸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할 수 있다는 거야, 할 수 없을 때도 결국은.
글쓴이: 현아 (https://instagram.com/withst4nd)
편집자: 민지
2023. 0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