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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May 15. 2022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요즘은 심란해서 어느 것 하나에도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여기에서 저기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고 감정은 그보다 더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올해 초, 결혼 10주년이 된 기념으로 남편과 둘만의 부부 워크숍을 했다. 워크숍 기획의 달인인 한 지인을 모더레이터로 섭외해 우리 집의 가훈을 정하는 것을 목표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한 거다.

그 결과 만들어진 우리 집 가훈은 ‘소곤소곤’. 좀 더 가까이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하자는 의미다. 가훈이 나오기까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그 과정에서 나와 남편은 둘 다 ‘자연’과 가까이 있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그게 둘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워크숍 이후, 막연하지만 우리는 ‘귀촌’과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귀농’은 못할 것 같지만 ‘귀촌’은 하고 싶다고 말했고 남편은 ‘귀농’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겐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며 책방 같은 것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로망이 있었다. 남편은 로망보다는 불안정한 생계에 대한 염증이 더 큰 것 같았다.

아무리 현실감각이 없는 나지만, 당장 먹고 살 거리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기에 시골로 내려가는 것은 최소 10년 이후에나 이룰 수 있는 막연한 꿈으로, 스리슬쩍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겨울의 마지막을 보내고 여름을 향해 가는 길목에 서 있던 어느 날, 남편이 불쑥 물었다.


“화순에 일자리가 있는데 한 번 써볼까? 연봉이 꽤 세.”


경력직을 뽑는 자리였고, 남편이 생각하는 연봉 수준도 맞았다. 게다가 남편의 본가와 3-40분 거리에 위치한 화순은 지나갈 때마다 내가 입버릇처럼 ‘화순 좋지~’라고 말하던 지역이었다.

수입이 늘 불안정해 스트레스가 많았던 남편에게도, 귀촌하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나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좋네! 어머니랑도 가까워지고! 화순 살기 좋잖아~한 번 써봐!”


늘 깊이 생각하지 않는 나는, 그날도 가볍게 대답했다. 상시채용 중이었던 회사에서는 남편의 이력서를 보고 바로 면접요청을 했고 면접을 본 지 3일 만에 바로 출근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의 심란함이 시작되었다.


당장 내가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당분간 주말 부부로 지내야 했는데 하원을 담당하던 남편 대신 급하게 하원 도우미를 알아봐야 했다. 아이가 없을 때야 '주말부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말에 웃었지만, 아무래도 덕을 쌓은 건 나보다 남편 쪽 조상인 것 같아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뿐인가. 남편이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결정을 하면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막상 그만둘 생각을 하니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다는 게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번의 경력단절 이후 어렵게 되돌아온 자리였다. 지금 그만두면 이제 다시 어딘가에 또 소속되어 일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언제 그만둘까, 생각하던 직장이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화순의 일자리를 이야기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오븐을 생각했다. 남편이 입사를 해서 화순에 내려가면 오븐을 꼭 마련할 거라고, 아이와 함께 쿠키와 빵을 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귀촌은 몽글몽글한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고 달달한 빵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는 포근한 시간 같은 것이었나 보다.

막상 귀촌이 눈앞에 닥친 현실이 되자 오븐이고, 마당이고 머릿속에 비눗방울처럼 퐁퐁 피어오르던 이미지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현재의 안정적인 직장과 조금씩 쌓이고 있는 커리어, 언제든 필요하면 모든 걸 할 수 있는 도시의 편리함이 점점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시골길을 생각하니 정나미 없다고 느껴지던 신도시의 널찍하고 깔끔한 인도와 차도가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동네에 있는 인공호수공원의  가꾸어진 조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고, 아이와 편하게 킥보드를 타고 가다 보면 곳곳에 놀이터가 있는 동네가 천혜의 환경처럼 느껴졌다.

‘내가 귀촌을 원하는 게 맞나’, 하는 뒤늦은 물음이 서늘하게 내 뇌리를 파고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7살까지는 영어니, 한글이니 일부러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던 생각은 유치원의 특별활동 프로그램 앞에서 아무런 힘없이 그냥 무너졌다. 우리말이 먼저지, 해놓고서 주변의 무수한 ‘엄마표 영어’의 정보를 접하며 소심해졌고 아이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되도록 평범한 게 좋다며 남들이 하는 걸 따라 하려고 했다. 장난감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가급적 집에 있는 생활 용품들을 다양하게 활용하며 가지고 놀게 할 거라고 했던 우리 집에는 장난감이 차고 넘치고 있다.

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서서 확고한 신념을 갖지도, 지키지도 못한 채 달콤한 꿈만 꾸는 나.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알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구나. 무엇보다 이 뼈 아픈 자각이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세 달 정도, 회사를 탐색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세 달은 나에게도 탐색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냥 말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나의 행동이 될 수 있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이제는 진짜 솔직한 대답을 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경계선 위에 애매하게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 이렇게 빨리 말이 씨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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