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환승역, 손에 들고 있던 전자책 뷰어를 가방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었다. 뷰어를 밀어 넣으려는데 가방 안쪽에 동그란 돌멩이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야근을 하고 축 처져 돌아가는 길, 예상치 못한 아이의 흔적에 마음이 뭉근해졌다.
아이는 자주 이곳저곳에 자기의 흔적을 남겼다. 나에게 안겨 살다시피 했던 아기 때는 늘 티셔츠 어깨 부위에 침을 흥건하게 묻혀놨고, 뭔가를 ‘넣는’ 행위에 몰두해있던 돌 무렵에는 넣을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뭐든지 넣었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 가방을 열었더니 그 안에 장난감이 가득 들어있었고, 어느 날은 쓰레기통에 내가 버리지 않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내 가방 속에서도 아이의 물건들이 나왔다. 때로는 장난감 자동차가 때로는 버리려고 돌돌 말아둔 아이의 불룩한 기저귀가 깜짝 선물처럼 내 가방 안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은 아이와 1박 2일로 춘천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집에 와서 짐을 정리하려고 가방을 푸는데 가방 안에 웬 하얀 플라스틱 그릇이 들어있는 거다. 그릇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한참을 쳐다봤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릇인데, 뭐지, 이상하네, 하는 순간 식당에서 아이가 테이블 한쪽에 쌓여있던 그릇과 숟가락 따위를 가지고 놀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와 함께 갔던 춘천 닭갈비 식당,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없던 사이 아이는 가지고 놀던 그릇을 내 가방에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아이가 조금 크고 나니 이제는, 종종 출근하는 나에게 선물이라며 자기 물건을 내민다. 자기가 준 것을 주머니에 꼭 넣어두고 자기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라는 주문과 함께. 아이는 그것이 나와 자기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아이는 어떤 날은 마음도 주겠다고 자기 가슴에서 작은 손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선물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날은 구슬, 어떤 날은 자석 블록 한 조각, 어떤 날은 자기가 아끼는 인형, 어떤 날은 산에서 주워온 도토리, 어떤 날은 변신 미니 자동차.
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그 물건들은 하루 종일 아이가 주문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가끔씩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만져지는 그 물건들에 나는 생각보다 자주 위로 받았다. 아이 말대로 아이가 준 선물 덕에 나는 아이와 연결됐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과 어깨가 부드럽게 펴졌다.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꽃을 선물하던 날이 생각난다. 아이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볼을 하고 아빠와 산책길에 꺾은 들꽃을 나에게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의 꽃 선물에,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 잔뜩 기대를 품은 아이 얼굴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처음엔 감동이던 것이 매일 반복되고 집 안 곳곳에 처치 곤란한 것들이 쌓여가니 점점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선물이라고 가져온 빨간 열매는 곧 주글주글 시들어 쓰레기가 되었고, 사방에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는 갈대는 병에 꽂으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아이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어김없이 밖에서 꺾은 꽃과 풀 한 뭉치를 손에 들고 집에 왔다. 조금 지쳐있었던 나는 아이의 기대만큼 크게 호응을 해주지 못했다. 나의 밋밋한 반응을 본 남편이 그랬다. 아이가 밖에서 노는 두 시간 내내 한 손에 그것을 꼭 쥐고 있었다고, 엄마에게 가져다 줄 것이니 자기가 들겠다며, 아빠한테 맡기라고 해도 맡기지 않고 자기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면 아이는 항상 모든 것에, 매 순간에 진심이었다.
강아지풀만 보면 꺾기 바빴던 때, 아이는 길가에 수없이 피어있는 강아지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두 개를 고르기 위해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고심했다. 양 손에 하나씩 쥐어야 하는 강아지풀을 절대 대충 고르는 법이 없었다. 그뿐인가. 소꿉놀이를 할 때에도 어느 것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다. 자기가 본 순서 그대로 음식을 만들고 접시에 담고, 숟가락으로 조심히 떠먹고, 설거지를 한 그릇은 물기가 빠질 수 있게 싱크대 옆에 잘 뒤집어 놓는다.
아마 나에게 주겠다고 꺾은 꽃과 풀도 그냥 대충 꺾은 게 아니었을 거다. 분명히 자기 눈에 가장 예뻐 보이는 것을 고르고 골라 덜 여문 손으로 조심스레 꺾어 손에 쥐었을 거다.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 기대하면서. 아이의 진심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뒤처리 생각에 한숨짓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이에게 미안해서, 늘 진심인 아이 앞에서 가면을 쓴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이 돌멩이는 언제 내 가방에 들어왔을까. 저번에 놀이터에서 놀던 때였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깜짝 선물처럼 나에게 찾아온 아이는 여전히 나에게 놀라운 순간들을 많이 선사한다. 아이가 나에게 주는 깜짝 선물 같은 하루하루, 그 귀한 날들에 쉽게 익숙해지지 말자고, 돌멩이 두 개를 바라보며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