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갈래요!”
저녁 무렵, 마트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아빠와 잘 놀고 있던 우주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기가 마트에 가겠단다.
“우주 혼자서 간다고?”
“네!”
그전에도 몇 번씩 혼자서 지하 주차장에 가보겠다, 어린이집까지 혼자 가겠다, 하며 조금씩 도전을 해봤던 터라 굳이 안 된다고 막아설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아파트 후문 바로 앞에 있는 마트라 가는 길은 이미 훤히 알고 있고, 마트 앞에 차가 멈춰서는 곳이 있긴 했지만 우주 정도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험요소였다.
“그래, 그럼 엄마가 뭐 사와야 하는지 써줄게.”
혼자 심부름 간다는 생각에 벌써 들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옆에서 나는 작은 메모지에 당근과 파프리카, 양송이버섯 그림을 그리고 그럴듯하게 색칠을 했다. 그 옆에 친절하게 야채의 이름과 필요한 수량을 써넣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무얼 사와야 하는지 내 설명을 진지하게 들은 아이는 옷을 챙겨입더니 그런다.
“장바구니도 주세요.”
우주의 몸에 맞는 적당한 크기의 장바구니를 챙겨 건네고, 겉옷 주머니에 카드를 넣어 주었다. 우주는 한 손엔 메모지, 한 손엔 장바구니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우주에게 손을 흔들던 나는 우주가 나가자마자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우주 뒤를 따라 나갔다. 혹시 나가자마자 들키면 핑계를 댈 요량으로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갔는데 우주는 아무런 거리낌 하나 없이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가다가 주춤거리며 뒤라도 돌아볼 줄 알았건만 한 손에 든 장바구니를 앞뒤로 흔드는 모습이 그저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우주가 혼자 하는 첫 심부름. 아이가 길을 잃거나, 위험한 상황이 닥칠까 걱정되기보다 뒤따라가다 들킬까봐 더 긴장됐다.
007 작전이라도 펼치듯 우주의 동선을 몰래 따라갈 수 있는 길을 골라 우주의 뒤를 쫓았다.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가, 큰 나무가 없어지면 쭈그리고 앉았다가,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뛰어나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슈퍼에 미리 전화라도 해서 상황 설명을 하고 협조를 구할 걸 그랬나, 생각이 스칠 즈음 우주는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마트 입구에서 서성이다 몸을 숨기고 있는데 안에서 아줌마들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 사러 왔대?” “어머, 귀여워라.” “저 밖에 있는 것 같더라고.” 등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띠링, 카드 결제 메시지가 도착했다. 휴, 성공이다. 우주의 첫 심부름!
이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들키지 않으면 된다. 우주보다 먼저 집에 가야 하나, 아니면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우주를 뒤따라가는데 우주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헉. 여긴 숨을 곳이 없는데. 어쩌지. 아무런 구조물이 없는 널찍한 길 한복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주가 휙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아주 의연하게.
“엄마, 우주는 엄마가 살그머니 우주 지켜보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아, 그랬어? 하하하하. 그랬구나.”
“네.”
내가 뒤따라 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그렇게 씩씩하게 갈 수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내가 뒤에 있는 걸 알았을까. 그래도 혼자서 마트에 가서 야채를 고르고, 계산까지 하고 나온 우주가 정말 대견했다.
“우주야, 근데 어떻게 혼자 심부름 갈 생각을 한 거야?”
“나도 이걸 하겠다고 마음 먹은 거지.”
“아, 마음을 먹은 거구나. 무섭지 않았어?”
“응. 전혀. 재미있을 것 같았어.”
“그랬구나.”
그날 밤 우주가 너무 기특하다는 내 말에 남편은, 우주가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많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봤을 거라고, 그래서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됐을 거라고, 말했다.
맞다. 우주는 항상 그랬다. 끊임없이 우리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될 때까지 따라 했다. 뭐든 자기가 하겠다며 실패를 반복하다 결국은 해냈다. 아마 마트에 가서 혼자 물건을 사는 것도, 우리와 마트를 다니면서 지켜보며 혼자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하는 상상을 수없이 해보았을 거다. 그러다 오늘,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치고 올라온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가 뒤에 있다는 것. 그것도 분명 힘이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우주가 언제부터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엄마가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었을 거다.
엄마가 살그머니 우주를 지켜보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우주의 그 말이 나는 참 기뻤다. 내가 정말 뒤에 있건 없건, 언제나 엄마가 우주를 지켜줄 거라는 것을, 우주의 편이 되어줄 거라는 사실을 우주가 계속 마음에 품고 자라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