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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Apr 07. 2022

01. 오늘도 한 뼘 더 자라나는 너를 응원해

그림책 <이만큼 컸어요!>

언니, 벌써 새해야!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은지는 꽤 되었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한 깨끗한 다이어리에 어떤 다짐 같은 것이라도 꾹꾹 적으며 새해맞이를 하곤 했는데, 올해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새로운 해로 넘어와 버렸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나도 모르게 목적지에 도착해버린 느낌이라 2022년이라는 것이 아직도 살짝 얼떨떨해.

한 해 정리도, 새해 다짐도, 뭐 하나 제대로 못한 채 얼렁뚱땅 2022년으로 넘어왔지만 그래도 새해 일정에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른 건 몰라도 올해 이것 하나만은 쭉 나를 이끌어주겠다고 생각하니 왠지 안심이 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누군가와 마주보고 앉아 차분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 꽤 많이 그리웠거든.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그 느린 시간들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지게 될지 정말 기대 돼.

거의 십 년 만에 만났던 지난여름만 해도 우리가 이런 편지를 주고받게 될 거란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해, 그치?

 



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고 첫 책은 어떤 것이 좋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만큼 컸어요!>라는 책을 골라봤어. 이 책은 우주가 '자란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던 두 돌 무렵부터 함께 봤는데 만 네 살이 되어가는 지금도 우주는 이 책을 읽어주면 금방 몰입해서 봐. 아마도 그림책 속 아이가 자기와 많이 닮아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그림책의 배경은 농촌이야. 책 속에서 엄마는 아이와 함께 계절이 흘러감에 따라 밭을 고르고, 나뭇가지를 치고, 씨를 뿌려. 아이는 엄마의 일을 도우면서 계속 묻지. “엄마, 나도 클까요?” 하고. 강아지도, 병아리도, 풀도, 나무도 모두모두 크는데 자기만 그대로인 것 같다는 아이의 시간은 더디게, 하지만 착실하게 흘러가.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아이는 엄마와 함께 두꺼운 옷을 벗어 상자에 넣어둬. 그렇게 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지나 곧 추운 겨울이 되고, 아이는 지난봄에 넣어두었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는데 소매는 짧아져 있고, 바지는 껑충 올라가 있지.

아이는 신이 나서 소리쳐. “나도 이만큼 컸어!” 하고.

이 부분이 바로 우주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야. 아이가 환호하는 순간 곁눈질로 우주 표정을 보면 얼마나 흐뭇하게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는지 몰라. 이 아이의 마음을 우주도 아는 거겠지? 이 책이 처음 나온 게 1947년이라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빨리 자라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은 비슷한가봐. (난 어렸을 때 빨리 나이를 먹으려고 떡국을 두 그릇, 세 그릇 먹던 아이였거든.)


요즘 우주는 밤에 자기 전에 자꾸 다리가 아프다고 주물러 달라고 해.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징징대고. 그러면 나는 침대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에 새삼 놀라며 아이 다리를 꾹꾹 눌러주며 말해.

 "우주가 밤에 또 키가 컸나봐."

그러면 우주는 어김없이 물어보지. “왜요?”


"우주 다리가 길어졌으니까 이렇게 아프지. 다리가 늘어났는데 당연히 아프지 않겠어?"


그러면 우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몸을 있는 힘껏 꼿꼿이 세우며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거야.

“저 또 컸지요?” 하고.


언젠가 한 번은 아이를 씻기려고 준비를 하는데 혼자서 옷을 다 벗고 욕실에 들어온 거야. 위풍당당하게 알몸으로 들어와 으쓱거리며 “저 다 컸지요? 아기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점점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뭐든 다 혼자 하려고 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가 있기는 하지만(사실 꽤 자주) 서툰 손놀림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특해. 아이들은 정말 부지런하게 크는 것 같아.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가 하는 것을 기웃거리며 보다 따라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결국은 해내고 말잖아.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 나는 어땠나 생각해보게 돼.




초등학교 다닐 때 새 학년 첫 날이 되면 선생님은 우리들을 모두 교실 복도로 내보내서 키대로 줄줄이 세워뒀어. 가장 작은 아이부터 큰 아이까지 고르게 정렬이 끝나면 교실 안의 맨 앞줄부터 차례대로 가서 앉아야 했지. 늘 작은 편에 속했던 나는 어떻게든 한 줄이라도 더 뒤에 앉고 싶어서 온 힘을 다해 허리를 펴고, 목을 늘이고, 정수리를 있는 대로 높이려고 애를 쓰곤 했었어. (언니도 분명 비슷한 경험이 있을 거야)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항상 키가 크고 싶었고, 조금 더 커서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 스무 살 때 꿈은 무려 서른 살이 되는 거였고.

생각해보면 나는 늘 크고 싶었고, 성장하고 싶었고, 성숙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의 나’는 늘 부족하게만 보여서 그보다 더 나아지고 싶었거든.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어지고, 모든 것에 의연해지고 능숙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거야. 근데 서른이 되던 해에 그게 다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나에게 ‘서른’은 ‘어른’이 되는 나이였거든? (지금 생각하면 서른이 얼마나 어리게 느껴지는지!) 근데 ‘서른’이 된 황다경은 십대 후반에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라고. 그때 깨달았던 것 같아.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구나.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구나. 그래서 ‘어른’답지 않은 어른들이 많은 거구나. 하고.

근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나한테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도 들어.


우주는 최근에 단추 끼우는 것에도 성공했는데, 단추를 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몰라. 작은 단추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추 구멍이 있는 옷깃을 잡아서 그 사이에 끼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처음엔 자꾸 손에서 단추가 빠져나갔고, 그 다음엔 구멍에 맞춰 끼우지 못해 끙끙 거렸고, 어떤 날은 구멍을 잘못 찾아 옷이 삐뚤어졌고. 그러길 며칠을 반복하다가 이제 가볍게 단추를 끼울 수 있게 된 거야.

나도 분명히 그렇게 서툴지만 조금씩, 조금씩 크고 있었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든 자라고 있었을 텐데 과거의 나는 왜 그렇게 ‘지금의 나’를 부족하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지금’의 부족한 내가 싫어서 자꾸 그 시간에서 멀어지려고만 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안타까워. 그림책 속 아이의 엄마처럼 누군가 나에게 ‘너도 조금씩 크고 있다’고 말해줬다면 나는 그때의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언니, 근데 나 이렇게 쓰다 보니 새해 다짐이 떠올랐어.

위로 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후로 내 바람은 아래로 조금 더 깊이 튼튼하게 자라는 게 되었거든. 근데 아이를 키우다보니 자꾸 나의 부끄러운 민낯을 확인하면서 스스로에게 모멸감이 드는 날이 많은 거야. 그림책 속에 나오는 엄마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인자하고 지혜로운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자는 아이를 보며 반성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아이한테 소리치는 나를 마주하면서 깊이 자라긴커녕 자꾸 내 얕은 밑바닥만 드러나서 자괴감에 빠진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새해에는 부족하지만 분명,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나를 좀 더 응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의 첫 번째 새해 다짐! 왠지 마음에 든다.

주절주절 쓰다보니까 말이 너무 길어졌어. (근데 나 아직도 할 말이 너무 많아. 어쩌지?) 그래도 첫 편지는 여기서 이만 마칠게. 언니가 금방 나한테 질려버리면 안되니까.


있잖아 이 책,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그림책이야. 계절이 바뀌어가며 변하는 시골풍경을 보면서 거기 나오는 꽃과 나무 이름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꽤 좋았고. 한국에서는 원서로도 구할 수가 있는 것 같은데 프랑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언니, 편지 기다릴게.

새해 복 많이 받아!


22.01.06

다경이가


글 : 루스 크라우스

그림 : 헬린 옥슨버리

역 : 공경희

웅진주니어|2007년

원제 : The Growing Story



#성장 #자란다는것 #계절 #자연 #유아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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