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나는 꽤 귀여운 능력을 갖고 있다. 바로 ‘상황 기억력’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상대를 만났을 때 대화의 내용, 그때의 장소, 분위기와 날씨가 어땠는지를 사진 또는 영상을 찍듯이 꽤 자세히 기억한다. 예를 들어 친구와 서울역 근처에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친구와 역에서 만나 고즈넉한 카페에 가는 상황, 카페에서 나와 편백찜 식당까지 가는 길, 대화 내용, 코끝이 추웠던 겨울의 날씨와 실내의 따뜻한 분위기를 사진을 찍듯이 기억한다.
그리고 이는 반가움, 안정감의 형태로 내 마음속에 기억된다. 이러한 능력은 다음번 그 상대와 다시 만났을 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수단이 된다. 누구나 이걸 갖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10년 전에 대화했던 내용까지 꽤 자세히 기억하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이 이건 내 능력이라고 말해주면서부터, 이 능력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 고민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감정에 예민했고,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표정을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표정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퇴근한 부모님 얼굴을 보고 동생들에게 속닥이며 주의를 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표정으로 그 사람의 기분을 완벽히 알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사람들의 행동도 관찰했다.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말, 표정, 행동을 보면서 성격을 파악하고,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리고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 이미지로 보이도록 나를 바꿨다. 그렇게 ‘상황 기억력’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인간관계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친구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온갖 기억을 총동원하고, 좋았던 대화 내용을 기억했다가 시간이 지난 후 다시금 끄집어냈다. 그렇게 유대감을 느끼고,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기억력’은 고도화된 눈치작전을 통해 계속 발전해 갔다. 눈치를 채고 행동한 뒤,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했다. 나는 이 과정을 오답 노트 형식으로 머릿속에 기억했다. 사례를 들어보자면, 7살 때 ‘아기공룡 둘리’를 보려고 교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인기 많은 여자애가 자신이 앞자리에서 보고 싶으니 비키라고 했었다. 날 내려다보는 그 아이의 표정, 그 때 상황을 관전하는 다른 아이들, DVD 플레이어를 준비하느라 바쁜 선생님. 이 분위기를 재빠르게 파악한 7살의 나는 ‘나는 이들과 맞서 싸울 능력은 없고, 나를 보호해 줄 분은 지금 바쁜 상황이다.’라고 생각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둘리’ 를 앞에서 보지 못해 슬펐지만, 다행히 추가적인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내가 크게 손해 볼 상황이 아니라면 적당히 져주며 조용히 넘어가자’는 것이 머릿속 눈치 오답 노트에 저장되었고, 비슷하게 행동했다. 이렇게 경험과 저장을 반복하면서 의식적으로 상황과 분위기에 주의를 기울였고, 결국 그 상황을 사진 찍듯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의 학창 시절 동안 수많은 군상을 만났다. 상황에 따라 나를 바꾸어도 모든 사람이 내 모습을 좋아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또 머릿속 오답 노트대로 행동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맺어진 좋은 인연도 있었다. 이때 깨달은 점은 과도하게 이 능력을 써가며 모든 사람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사람들과의 인연은 내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어진 미래는 내가 어떤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남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나의 성장을 위해 이 능력을 써보기로 다짐했다.
성인이 되었고, 성장을 위한 능력 사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연령층은 정말 다양해졌다. 사람들과 공감대를 쌓기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이 제일 중요할 뿐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게는 10대, 많게는 60대까지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대화 내용은 꽤 깊었다.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선배의 성장 과정, 영국의 은퇴한 사회 교사가 알려주는 인간관계론, 사별한 사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할머니의 이야기 등 단순히 나의 얄팍한 뇌로는 담아내기 힘든 그들의 인생 스토리가 있었다. 나는 이런 멋진 그들의 인생을 정말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이분들을 만났을 때, 다른 이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당신의 인생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를 간략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적는 타이밍은 그날 집에 돌아와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진짜 나에게 감명을 주는 문장을 설명할 때, 그 즉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기록한다. 키워드라도 좋다. 예를 들어 해상도, 인간관계. 마음속 등등.
기록을 해가며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된 나에게 상대는 대체로 더 열심히 당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럴수록 그들의 감정에 깊게 감화되어 시간이 지나도 그들과의 대화 내용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놀랍게도 이런 기록 행위는 슬럼프를 깨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것도 풀리지 않을 때, 내가 기록해 둔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상황 또한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나도 “예전에 그랬었다”라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순간이 올 거라 믿으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에 놓인 친구들에게도 이런 기록을 토대로 대화를 나누면, 큰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상대의 행동을 파악하고, 머릿속 오답 노트를 작성하면서 필요하면 즉시 기록하는 나의 습관은 나이에 비해 더 많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경험도 더 깊게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감정이 예민했던 어린 나는 ‘나의 행동에 타인이 어떻게 반응할까’에 맞춰서 이 능력을 사용했었다. 이제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만난다면, 시선을 남이 아닌 ‘타인과 교류하면서 나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으로 돌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능력의 쓸모에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도 내가 가진 ‘상황 기억력’을 잘 가꾸어나가 더 성숙하고 선한 사람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