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녕 제주 (하영드리미 연재 완료)

by 김지만

'하영드리미'는 대한민국 남쪽 섬에 살았던 어떤 사람의 20대 초중반의 기록을 담고 있다.

만 23세까지 제주도에 살았다.

만 23세,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 살았다.

만 26세. 바다 근처가 좋아서,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만 27세. 인천에서 살고 종종 제주로 간다.

학생들에게 건강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생기부를 다시 읽어봤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담담하게 세부특기사항에 적어주신 내용들이다.

' 평소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친구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능력이 뛰어남.'
'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소개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 찾기와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할 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반 학생들의 호응을 얻음.'
' 자신만의 학습방법에 대한 확신이 크며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뚜렷한 자기 주관을 바탕으로 학업에 임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학생.'
'맏이로서 막중한 책임감이 몸에 배어 있어 또래들에 비해 생각이 많고 조그만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마음 졸이기도 하지만 무슨 일에 임하든, 지나친 조바심은 오히려 방해요인이 될 수 있다는 교사의 조언을 받고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함.'
'로또의 유래와 로또의 확률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친 확률의 로또 번호를 고르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학업에 정진하고 당당하게 돈을 벌어보자고 발표함.'
'모든 학생에게 공정한 교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음.'




내가 모르는 '나'를 그 당시 담임선생님들은 관찰을 하고 담담하게 세부특기사항에 적어주셨다. 생각해 보면 초중고 때는 내 모습을 알아가기보다 사회의 기준을 습득하는 데 바빴다. 어른 말씀 잘 듣기, 공부 열심히 하기, 부지런하기, 일찍 다니기, 싸우지 않기처럼 말이다.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을 습득했다면, 20대는 내 기준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단 음식을 좋아한다

부터

나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 나는 달릴 때 행복하다, 나는 소소하게 행복해한다, 나는 루틴을 잘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불안도가 올라간다, 나는 누워서 유튜브를 보면 3시간 정도까지는 행복하다가 그 이후로는 불안하고 슬프다

등등 20대는 본인사용설명서를 작성하는 시기다.



많은 어른들은 20대에는 많은 경험을 해보라고 한다. 경험은 중요하다. 경험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것은 좋지만, 성찰 없는 양만 많은 경험보다, 경험 이후의 질이 더 중요했다. 내가 깨달은 걸 기록하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꿈의 크기를 가늠하고, 상상하고 기대하고, 불안해하고, 다시 다짐하는 자기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꼰대얘기는 여기까지.)


제주도에서 약 24년간 살면서, 성공경험, 실패경험, 자기 돌봄, 타인과의 관계 등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내가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보다, '내가 얼마나 나에게 집중하는지'가 중요했다.



학교라는 소속집단을 통해서 내가 기회를 잡으려고 하면, 그만큼 사회는 나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을 배웠다.

병원 실습을 하면서, 인간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깨닫고, 삶의 유한성 앞에서 밝게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학교 헬스트레이너 사장님께 운동을 배우며, 사람에게 건강한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학교 교수님들께 수업을 들으며, 품위 있는 어른은 기본에 충실하다는 점을 배웠다.

한미학생회의를 기획하며, 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데 재미를 느낌을 배웠다.

한미학생회의 팀을 1년 동안 유지하며, 여기를 통해 내가 얻는 파이를 생각하기보다, 함께 공통의 목표 이룬다면 그것만으로 성공이라는 팀워크의 가치를 배웠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루가 주는 소중함을 배웠다. 오늘과 내일은 독립적이어서 매일 20km를 걷는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실함의 가치를 배웠다.

1년 동안 휴학을 하면서, 내 삶에서 '건강'이 차지하는 범위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고, 건강교육 분야에 종사하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


대학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그리는 목표는 달라도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든든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배웠다.

나의 기록들을 적은 10권의 일기장을 통해 '나'라는 사람과 친해지는 법을 배웠다.


일기장에 적었던 내용들 중 '정답은 없다'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동안 수능이나 지필고사 시험은 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걸 체크했지. 문제가 원하는 답을 내가 체크하고 확인받는 방식에 익숙했다. 정답은 존재하고, 문제는 이미 그 답을 알고, 빨리 답을 내놓으라는 과정. 내 행동도 비슷하다. 내가 먼저 결단 내리고, 주변인들에게 알리는 방식. 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다 수평이지. 정답이 없고 합의만 있을 뿐. 둘 다 정답이 아닐 수 있어. 합의점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회에서는 점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데 너 생각은 어때? 너 생각을 통해 합의된 결과를 내보고 싶어.'의견을 묻고. 소통을 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나와 상대 둘 다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어렵지만, 계속 연습해야지.

하영드리미에 적지 않은 콘텐츠들도 많다. 가령, 밴드 동아리 (드럼), 학교 대학 축제, 연애, 스리랑카 봉사활동, 영어회화 동아리, 알바 등, 많은 경험과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를 성장시켜 주는 과정, 시험들을 통해 나는 '스스로의 삶을 잘 설계해 가는 사람', '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고, 공동체의 건강증진을 위해 교육하고 연구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정체성들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낭비했던 시간들도 있고, 치열하게 살아서 기억나지 않은 시간들도 많았다.

이 '하영드리미'라는 글을 쓰면서 이미 지나간 시간들도 감싸주고 안아주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같이 잘 살아주길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하영드리미'는 나의 사용설명서를 작성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나를 잘 아끼고, 하루에 충실하고,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하영드리미를 2016년 2월 제주도 탐라도서관에서 20대에 하고 싶은 일을 적었던 9년 전의 나에게 바친다.

야! 너 덕분에 나는 이만치 자랐어!




- 하영드리미 연재 완료 -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1화특별한 능력 보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