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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주 변호사 Apr 24. 2018

인간감정의 단순함에 관하여

비오는 날의 뜻밖의 조정성립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습기는 많고 날은 후텁지근 하고.....정말 하루종일 사무실에만 있고싶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서초동 법원에서 조정이 있었기 때문에 법원을 반드시 가야만 했다. 우산과 가방을 집어들고 법원을 향하면서도 마음은 날씨만큼이나 무거웠다. 오늘 조정은 임대차 중 분쟁이 발생하여 임대인과 임차인이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서로 다투는 소송이었는데 이미 서로간에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여서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였다.

© ingemusic, 출처 Unsplash


여기서 간단히 조정절차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조정절차란 당사자간 소송 중에 서로 원만한 합의를 위해 마련되는 별도의 절차를 말한다. 조정절차는 사실과 법리를 다투는 재판과는 달리 서로 일정부분씩을 양보하여 화해를 하는 과정이다. 조정절차에서는 원칙적으로 쌍방 당사자와 변호사가 참여하고 법원에서 위촉하는 조정위원이나 판사가 화해를 중재한다(대부분은 판사가 아닌 조정위원이 조정을 중재하는 편이다). 조정절차는 재판과 달리 그 시간이 길고 당사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어느정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편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한다. 이렇게 쌍방이 어느정도 하고싶은 말을 하면 마지막에는 서로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다.(대략적으로 합의는 원고와 피고의 주장금액 중간쯤에서 정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조정을 할 때는 신중해야 되는 것이 조정절차에서 쌍방이 합의하고 서명을 하게되면 더 이상 그 조정결과에 대해서는 판결과 달리 상소를 하는 등 다툴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절차에 따른 합의도 쌍방간에 악감정이 심하지 않은 상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서로 이미 등을 돌리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쌓인 상태라면 조정실은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닌 시장통이 된다.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헐뜯다가 결국 더 감정만 상한 채로 조정이 결렬되는 것이다. 

그 날의 조정도 바로 쌍방의 악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2심까지 온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당사자들이 다투는 금액은 200만 원이 채 넘지 않았지만 당사자들은 절대 한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굳은 결기를 표시하였다. 조정은 이례적으로 주심판사(사건을 담당하는 판사)가 직접 중재하였고 조정절차도 판사실에서 이루어졌다. 조정 전에 미리 흥분하지 마시라고 의뢰인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지만 조정이 시작되고 나니 역시 양 당사자들은 본인들의 격한 감정들을 여과없이 드러내었다. 

© mohamed_hassan, 출처 Pixabay


연배가 조금 있어보이는 주심판사는 그런 당사자들의 말을 오랫동안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양 당사자에게 조금씩 양보를 권유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서로  원만하게 끝낼 때가 된 것이 아니냐, 00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여기에서 입은 손해는 다른 곳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당사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며 화해를 진전시켜 나갔다. 긴 시간에 걸친 양 당사자들의 한풀이와 판사의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진 끝에 뜻밖에도 조정이 성립되었다. 화해를 하고 나오는 의뢰인의 얼굴도 한결 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전까지는 절대 한푼도 줄 수 없다고 했던 의뢰인이 일정부분 양보를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어떻게 보면 강제적으로 조정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한 후 의뢰인이 어느정도 만족했다는 점도 새삼 기이했다.

조정을 중재한 판사가 화해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간 사이의 다툼은 무를 썰듯이 법리라는 칼로 재단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를 객관적인 잣대로만 들이미는 것은 반드시 모든 상황에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어떨 때는 그 당사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는 것이 빠르고 궁극적인 해결로 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 객관적인 사실 유무나 옳고 그름의 판단이 어느 한 사람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정절차를 마치고 나오는데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원에 올 때 내렸던 비와는 달리 그리 싫지 않았다. 이미 신발은 젖어있었음에도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그 때의 비나 지금의 비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문석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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