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이병헌,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성시경과 임영웅,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과 초겨울, 내가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 딸기, 천도복숭아이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화가나 그림은??? 음...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가 않았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그림은 그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림에는 정답이 없고 그림을 해석하는 것 또한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데 말이다. 그런 내가 어느 한 화가의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다시 또 보았다.
샐리 스토치(Sally Storch).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림에 스토리가 있고 섬세한 디테일과 함께 냉소적이지 않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돈다. 모든 그림에 여자가 등장하고 타인과 함께 있는 여자. 홀로 있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여자는 길을 걷다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거나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것들을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기차나 카페, 집 어느 공간에 있든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있다. 무표정한 여자의 시선 끝에 고독이 묻어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인 것을 즐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그 순간을 당당히 즐기는 것 같다.
나는 왜 그녀의 그림들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단 따뜻한 색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그림 안에 그려진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살피게 된다. 여자들은 모두 무표정하지만 곱게 빗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고, 원피스나 스커트 차림이다. 신발은 약간의 굽이 있는 힐을 신고 있는데 모든 여자들에게서 그녀들만의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장소에 상관없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고른 그림은 집의 테라스에서 홀터넥 원피스 차림으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책을 읽으며 집으로 돌아올 가족 중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아님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좋다고 느꼈을까? 왠지 나 같아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으로 에너지를 채우고 사람들을 만나 비워내는 스타일이다.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야 채워진다는데 나는 반대의 성향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건 즐겁고 또 그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너무 자주는 곤란하다.
비우는 양보다 채워져 있는 에너지가 많아야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하루 중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무엇보다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간을 잘 채워야 저녁시간을 가족(타인)들과 만났을 때 혼자였던 시간만큼 함께의 시간도 소중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것은 '나만의 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충실히 채워나가는 것으로 시작됨을 지금의 나는 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찻잔을 골라 커피를 내려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는 것. 오롯이 혼자만의 그 시간, 그 공간, 그 분위기가 나의 하루를 채워주는 든든한 생명수가 된다.
어제와 오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어김없이 나만의 시간 사수하기는 이어질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그 시간을 꼼꼼히 채우는데 누구보다 충실했던 작가는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 시간을 예전처럼 쓰지 못해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그림)을 보며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였다. 그림 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가 다정하게 내밀어준 그림들에서 나는 고독하지만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내 마음에 들어온 그림들은 내게 세상을 보는 창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와 내가 좋아하는 화풍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이 조금 더 풍성해질 수 있고, 나의 마음이 이유 없이 힘들 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듯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보며 나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더 늘었다는 것은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탈출구를 얻었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든든해진다.
혹시나 지금 좋아하는 그림이나 화가가 없다면 나의 마음을 당기게 하는 그림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찾았으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그림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된다.
(p114) 예술은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도와주기 때문에, 권태와 지루함을 공기처럼 먹고사는 현대인에게는 잊지 말고 챙겨 먹어야 하는 비타민D 같은 존재다. 햇빛을 보지 못한 날엔 해를 담은 그림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진짜 길을 산책하게 되면 방에서 보았던 그림을 떠올린다. 풍경 속의 밖, 바깥 속의 풍경에 현재를 심는다.
(p185) 느낌 있게 산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러니 우리는 충분히 느낌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을 '절대적으로' 지켜 나간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