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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Dec 29. 2023

상황과 이야기 (비비언 고닉)

시어머님과 함께 산다는 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어머님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곡명:향수)를 부르시는 뒷모습을 본다. 어머님의 노래방 18번이자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노래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곡이었다. 어머님은 성악을 전공하셨는데 남편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독창회를 하셨다고 했다.


사실 어머님이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워낙에 흥도 많으시고 노래도 잘 부르시는 데다 부를 기회도 많아 어디서든 곧잘 부르셔서 나는 어머님이 노래 부르시는 모습을 한해에도 여러 번 봐왔었던 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노래 부르시는 어머님의 뒷모습이 슬로비디오를 켠 듯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머님의 음성이 내 가슴속의 무언가를 찌르듯 저릿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 자신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 노래를 어디선가 듣게 되면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나겠구나...

같이 손뼉 치고 두 손 모아 어머님 노래를 듣던 오늘을 그리워하겠구나..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어머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홀시어머님과 11년을 함께 살았다. 밥도 할 줄 모르던 내가 장을 봐와서 음식을 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님과 살게 되면서 겪은 여러 일화들은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다만 나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른 어른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타인에게 그리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고 평소에 말수가 적은 편이다. 어머님은 사소하고 작은 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얘기하시고 타인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기분이 나쁜 일이 있으면 그걸 쉽게 얘기하지 않는데 어머님은 거의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편이다.

나는 먹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고 주린 배를 채우기만 하는 되는 편인데 어머님은 한 끼를 먹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쁘고 보기 좋게 차려서 먹는 걸 좋아하신다.

나는 요리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어머님은 재료 손질법부터 어떤 요리는 어느 그릇에 담아야 더 보기가 좋은 지도 알고 계실 만큼 센스가 넘치신다.

나는 좀 느긋하고 차분한 스타일인데 어머님은 성격이 급하고 욱하시는 편이다.

나는 말로 표현을 잘 안 하는데 어머님은 작은 부분까지 말로 표현하셔서 상대로부터 정이 많다는 얘기를 들으신다.


달라도 너무 다른 시어머니와 며느리이다. 처음에는 나의 사소한 부분까지 궁금해하시는 모습에서 이런 게 왜 궁금하실까.. 궁금하면 다 물어봐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저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시작되는 마음이었다. 결혼 후 몇 년 만에 알게 된 것은 나와 다른 어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직장 생활을 하며 상사와 함께 지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시어머님은 직장 상사와는 다른 존재였다.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나의 일상의 작은 행복조차도 즐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문제는 나는 여러모로 다 잘하는 며느리이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결혼 전에도 나는 전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는데 결혼과 동시에 무슨 욕심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만들어 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머님의 표정이나 말에서 조금이라도 실망한 기색이 있으면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게 되었고, 그런 나를 남편이 다독여 줄거라 여겼지만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러면서 오히려 남편에게 서운해하는 나를 보게 되었고 그 마음은 나를 더욱더 스스로의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다.


나만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어머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기본만을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쉽게 지치고, 상대를 등한시하면 그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었다.  시어머님과 함께 산다는 건  누가 누군가에게서 쉽게 떨어져 나가거나 쉽게 포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함께 살고 몇 년이 지나서야 서서히 알게 되었다. 아닌 건 에둘러서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어머님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했다. 어머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해해야 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하시고 어떤 때에 화를 내시는지, 어떤 것에 섭섭해하시고 어떤 것에 만족해하시는지 등을 알아가는 것.. 그건 어머님을 알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완벽하려는 나의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나의 일상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어머님이 요리하시면 나는 옆에서 주방 보조를 자처하게 되었고 그 덕에 요리는 주방장보다 주방 보조가 눈치껏 손발이 빨라야 일이 척척 진행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맥주를 좋아하시는 어머님과 금요일 저녁이면 함께 치맥을 즐겼다. 치킨 한 마리를 시키면 다행히도 서로 좋아하는 부위가 달랐다. 어머님은 닭가슴살을 좋아하는 며느리에게 제일 먼저 앞접시에 가슴살을 덜어주신다. 그럼 나는 닭날개를 어머님의 앞접시에 놓아드린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는 부위를 앞접시에 덜어주며 나의 남편이자 어머님의 아들의 흉을 같이 보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우리들만의 비밀을 만들어 가기도 했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시면 항상 며느리 선물을 제일 좋은 것으로 사 오시고 지나가다 예쁜 잠옷을 보면 항상 내 것까지 챙겨주셨다. 어머님은 여성스러운 잠옷을 좋아하셔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하얀 원피스 잠옷을 어머님께 종종 선물해 드리곤 했다.


어머님과 내가 공통점이 있다면 마른반찬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와 결혼한 남편과 내가 낳은 딸아이는 마른반찬을 즐겨 먹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어머님은 마른반찬을 만들어 주시면서 항상 "이거는 네가 좋아하잖아. 많아 가져가라. 이거는 두고두고 먹어도 괜찮다." 어머님은 말로 정을 낼 줄 아는 분이시다. 어머니과 함께 살면서 내가 보고 배운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 말로 표현하는 것, 상대방이 들었을 때 내가 챙김 받고 있다고 느끼는 말들을 정스럽게 하신다는 점이다. 그런 오고 가는 말속에서 사람사이에 정이 난다는 것을 나는 어머님을 통해서 배웠다. 그런 걸 말로 다 표현해야지 알아? 말 안 해도 알아야지라고 내 식대로 쉽게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음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가면서 어머님과 나는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 어머님이 내게 어떤 존재로 다가와있었는지는 파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시는 어머님의 뒷모습을 보고 알게 된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으로 한걸음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누군가에게서든 배울 점이 있다는 건 죽을 때까지 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 그걸 인정하고 내려놓는 과정이 인생이라는 걸 해마다 조금씩 알아간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망고를 사서 어머님집에 가서는

"어머님. 망고 저기 뒷베란다에 놓고 후숙 시켰다가 2~3일 뒤에 드세요.

어머님 좋아하시는 거니까 손님 오셔도 주시지 말고 뒀다가 어머님 혼자 다 드세요.

꼭이요~~!"


결혼 16년 차가 되어가는 나는 어머님께 배운 걸 어머님께 다시 되돌려 드리는 며느리가 되었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저자는 명확하면서도 친절하게 글쓰기에 대해 알려준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논픽션의 경우 무조건 솔직해야 한다는 것, 누구보다 독자들은 꾸며낸 것인지 아닌지 단번에 알아보니 최대한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상황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한걸음 뒤로 빠져나와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글 안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독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서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다. 어떤 식으로 풀어내면 좋을지.. 과연 내 글에서 나의 페르소나는 무엇인지... 오늘의 고민이 어떤 식으로든 나의 글에 묻어나길 바라면서 써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글쓰기는 그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폭넓고, 최대한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p31) 에세이의 거장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감응한 것은 고백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그들의 페르소나였다.


(p44)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 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 - 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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