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모든 것이 다른 아이. 상냥하고 깎아놓은 배같이 사근사근한 아이. 친절한 말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아이.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타인을 먼저 챙기는 아이. 콜라를 좋아하고 칼국수를 싫어하는 아이. 9센티 힐을 신고도 달리기 할 수 있는 아이(젊은 20대 시절 얘기). 누군가의 실없는 농담도 잘 받아주던 아이. 그렇게 모든 게 나와는 달랐지만 같은 포인트에서 함께 열받아하고 같은 예능을 보고 깔깔거리고 같은 드라마를 보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휴지를 건네던 사이였던 나의 소울 메이트인 그녀. 앞으로는 M이라 칭하겠다.
M과 나는 대학교 2학년 성당 교리교사 시절에 만난 사이다. 만나고 보니 같은 대학 다른 과를 다니고 있었다. M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평상시 그녀와 똑같이 환한 미소에 친절한 인사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당시 나는 얼음 공주(?)라는 별명에 걸맞게 처음 본 사람과는 쉽게 친해지기 힘들어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나에게 너무 친절하게 다가오면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의 편견에 맞서듯 M은 친절은 처음 본 사람에게도 행할 수 있는 행위이며 다정함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주었다. M의 친절과 다정함은 시간이 지나면 목꺽인 꽃대처럼 시들해 질거라 여겼지만 비옥한 토양의 식물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튼튼하고 더 깊게 뿌리내리는 듯했다.
M과 나는 둘 다 20대 중반이 되기 전에 대구에서 서울로 그것도 서울 강남으로 상경해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같이 살아볼까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함께 집을 구하러 다닌 첫날 마음에 드는 집을 바로 계약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우리는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 7년을 함께 살았다. 함께 살게 되면서 처음 느낀 건 마치 결혼한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퇴근한 사람이 더 늦게 퇴근한 친구를 기다렸다 같이 저녁밥을 먹고, 금요일 밤이면 집 앞 극장으로 걸어가 심야 영화를 보고 들어오는 길에 맥주를 사서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회사 일이며 회사 동료들의 얘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주말이면 함께 쇼핑을 하고 각자의 회사 동료들까지 모두 꾀고 있을 만큼 서로에 대한 애정은 깊어갔다. 그러다 어느 누군가가 회사일로 많이 바쁘거나 늦어지는 날이 잦아질 때, 서로의 애인이 생겨 주말을 함께 할 수 없을 때 알 수 없는 섭섭함이나 서운함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과 함께하는 공간 안에서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는 법을 알아가게 되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 온 날 화장실의 변기를 붙잡고 있으면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고, 남자 때문에 속상해서 힘들어하면 내 앞에서는 울어도 된다며 서로를 다독였다. 서로의 부족하고 못난 구석까지도 모두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며 가족만큼이나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결혼과 동시에 다시 대구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우리는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지금 나는 중3 딸의 엄마로 M은 여전히 자유를 즐기는 싱글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끔은 시간을 내어 통화를 하고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진짜 중요한 건 가까이 붙어살고 자주 보고 매일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그녀라면 기꺼이 잘 살아낼 거라는 믿음, 보이지 않아도 보일 듯이 닿아있는 신뢰, 말없이 전화하면 기다려줄 줄 아는 여유까지.. 그런 마음들이 모여 나와 M의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살면서 그런 친구 한 명 있다면 훗날 뒤돌아 봤을 때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는 개와 함께 살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글을 썼다. 둘이 너무 다르지만, 너무 달라서 서로를 더 애정했던 두 여자들 간의 우정이 그 어느 관계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으로 남겨진 친구의 상실감과 힘들고 괴롭지만 부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남겨진 이의 몫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작가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끝까지 함께 살아갈 수는 없다. 그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그렇다면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혹시라도 내가 남겨진 이가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하다고 여긴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문자를 보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줄 것이다. 그녀(그)는 당신의 친구일 테니까...
(p132) 나는 지금 깊은 유대와 일상 속에서 피어난 우정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공기를 붙잡으려는 시도와 모든 면에서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의 결합에는 일상의 묵묵함과 종요로움이 함께 있었다. 장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격자 울타리처럼.
(p141) 진정 필요로 하는 마음이 확고해진 것은 우리가 용기를 내어 서로에게 내보인 더 슬프고 힘든 순간들 - 의견 충돌이나 무력감 혹은 두려움 -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