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성별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by 에이
NISI20251004_0000691582_web_20251004212252_20251004212419827.jpg?type=w860 사진 출처: 뉴시스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의 이번 총리이자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일본의 언론은 "참의원(상원) 선거 참패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이시바 전 총리가 사임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시바 총리에 대한 한국의 평가는 대체로 '온건한 사람'이나 '대화가 그나마 통하는 상대'였다. 이시바 총리는 자신이 총리였던 동안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 대신 공물이나 공물 대금을 봉납했었다. 10월 4일 당시에는 신임 자민당 총재였던 다카이치가 처음으로 참배를 보류했었다. 모두가 야스쿠니 신사가 갖는 정치적 혹은 역사적 의미에 인근 국가의 중국과 한국의 민감한 반응을 의식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번 정권에서의 한국은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를 향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에만 초점을 맞춰 말한다. 국민 90%가 찬성하는 여성 천황 즉위 가능에 대해 많은 정치인들이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총리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일 테다. 충분히 공감 간다. 우리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12년, 외신에서는 "성차별이 극심한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라고 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것"이라는 측면에도 주목했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갖는 정체성은 여성이라는 성별적 특성 외에도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동시에 지적한 것이다. 성차별이 극심한 국가이기 때문에 여성이 사회적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혹은 못미더움이 산재해 있던 시기에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당시 상대 후보는 문재인 전 대통령, 안철수 국민의 힘 의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쉬운 사람이 하나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 한국 사회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를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생각해 보면, 민주당 계열이 주류가 되어가는 시작점도 2012년 대선이었던 듯 싶다.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고, 우리 사회는 모두 그가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데에 주목했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노래도 나왔었다.


취임 1년차, 한국 여성 민우회에서는 "박근혜정부 출범 1년,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여성인권은 바닥"이라는 논평을 냈다. 사회진보연대에서는 '여성정책으로 둔갑한 저출산 대책 박근혜 정부 여성 정책을 비판한다(박상은)'를 발표했다.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었음에도 여성의 구조적 차별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민주주의만 후퇴했다는 것이다. 또, 오마이 뉴스의 "유신시대로 회귀한 박근혜정부 쟁점(김삼웅)"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이 요직을 차지하며 지역주의가 부활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는 사람 자체를 구성하고,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과정에서 '여성'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젠더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하는 정체성에 앞서지 못한 셈이다. 아버지의 밀실 정치와 닮은 국정 농단으로 결국 첫 탄핵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 지난한 과정까지도 어쩌면 아버지를 닮았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APEC 정상회의-폐막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걱정을 안 한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한일 관계에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과거에는 '극우'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여자 아베라는 수식어가 있었다. 태극기를 향해 목례하는 모습이 '의외'로 평가 받는 것도 "한국이 기어오른다"라는 과거 발언이 한 몫을 했을 테다.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한국, 중국 등 주변국 반발을 겨냥해 "(우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つけ上がる) 것"이라고 했다. 'つけ上がる'(쯔케아가루)는 '상대방이 점잖거나 잘해주는 것을 악용해 버릇없이 굴다', 즉 우리말 속된 표현으로 '기어오르다'라는 의미이다. 다카이치는 또한 "주권 국가의 대표자로서 선인에게 존숭(존경·숭배)의 마음을 갖고 감사의 정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당연한 것을 계속해나가면 주변(한국 등 관련국)이 점점 바보같이 되어 불평을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라며 망언을 이어갔다.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위안부라 불리는 분들은 있었지만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 책임을 부인해왔다. 한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망언이 될 만한 말을 해 왔다. 물론 당 대표와 총리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이재명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않았나.


한국에는 이미 여성 대통령이라는 젠더에만 매몰되어 정체성을 규정한 한 정치인에 대한 선례가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를 단순한 여성 총리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나라인 것이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자국의 이익이 될 수만 있다면 신의를 지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게 외교, 국가 관계, 정치의 일면이다. 더는 여성이라는 젠더가 중요한 정체성의 일면이 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을 표하고 싶다. 그러므로 매몰되지 않기를 바랄 밖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국의 사면, 정치인이 된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