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vs 2025
2016년 초 겨울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무겁다. 테러방지법 통과를 반대하기 위해 당시 민주당의 장장 8일에 걸친 필리버스터가 시작되던 날, 한국에 없어 이 소식을 아주 나중에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PK에서 태어나 TK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오랜 기간 민주당을 지지했던 나에게 19대 국회는 구성도, 이런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도 서글프게 느껴졌었다. 지금에서야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기준으로 재석 의원 60명을 둔다는 법안이 등장해 상전벽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지만, 고작 이틀 째에 단 둘이 덩그러니 본회의장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2016년 필리버스터를 떠올리면 그때 민주당의 지지자로서 느꼈던 무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령 대선에서는 졌을지언정 사람들은 민주당이 총선에서 한 번도 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의 정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했고, 움직였다.
해방 직후 신탁통치에 대한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반공이 곧 반탁주의고, 애국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이후 친일파들이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이미지를 세탁하며 살아남은 것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꼽힌다. 신문 1면에 실리는 모든 정보를 사람들이 믿었던 시절, 레거시 미디어의 전성기, 언론이 제4의 권력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시절. 그래, 이 시절에는 그랬다. 언론만 잘 통제하면 충분히 독재자도 괜찮은 이미지를 향유할 수 있었고, 문제도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고, 유튜브가 등장하면서 정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소셜 미디어들의 발전으로 평범한 사람, 즉 언론인이 아니어도 자신의 의견을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이른바 '대안 언론'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2016년 필리버스터는 2000년대 이후 현대 정치사에서 꽤 중요한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테러 방지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당시 민주당이라는 정당의 이미지를 바꿔놓았고, 기어코 그해 총선에서 거야(巨野)라고 하는 결과로 증명되었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되고, 당시 새누리당이 원래 2당이 되었다. 당시 10시간이 넘는 필리버스터로 화제가 됐던 정청래 의원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가 되어 있다.
이전 정부가 죽이겠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끌어내리려던 사람은 이제 대통령이 되어 있다. 리얼미터 여론조사 상으론 54~56%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며 6개월 동안 거의 일정한 수준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대통령으로 한국 현대사에 어떤 족적을 남기게 될지 기대되는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의 힘이 모든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뉴스에는 더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2016년처럼 압도적인 검색량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의 보도량이 사람들의 관심을 일부 견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프레임 씌우기는 생각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확증 편향을 자극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들이 제출한 법안이나 이미 합의된 법안에도 반대 토론을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라는 그들의 원하는 반응보다는 '또 저러네'라는 반응을 야기하기 때문이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2016년 당시 민주당을 주도로 한 야당의 필리버스터까지 우리 역사에서 '필리버스터'라고 하는 반대 토론은 대대로 민주주의가 위협 받을 때 국회가 최후로 선택하던 방법처럼 여겨졌다. 필리버스터에서 얼굴을 알린 의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용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 방 없는 필리버스터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스토리도 없고, 희소성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현상에서 실패한 마케팅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기시감을 느낀다. 껍데기만 따라했다가 망한 마케팅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국민의 힘이 하고 있는 저 필리버스터를 보고 있자면, 그럴싸하게 시늉만 하는 속 빈 강정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가끔은 자당에서 발의한 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모습에서는 그럴싸한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언어가 오염되면 그 행위가 갖는 의미가 퇴색된다. 시의적절하지 않은 행위로 이전의 행위까지 오염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 참고한 글
- [리얼미터 여론조사]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 횡보, 여당 지지율은 상승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36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