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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원형의 책 15화

마법사의 모자와 무민

토베얀손/소년한길

by 고양이스웨터

무우~민!



'계몽사 소년소녀 현대세계명작전집’을 집에 들이던 날 엄마는 대문을 열어 둔 채 열무를 다듬고 있었다.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열무가 깔끔하게 이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낯선 아저씨가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책을 파는 외판원이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땀을 뻘뻘 흘리던 아저씨는 물 한 대접 청해 마시더니 본론으로 들어가 책 광고를 시작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 옆에 쭈그려 앉아서 장난감보다 책을 사 줘야 한다, 콩나물 값 몇 푼 아끼면 책 한 질을 얻을 수 있다, 아이가 넷이나 되니 다 같이 보면 금방 본전을 뽑겠다며 열변을 토했다.


아저씨가 준 광고지를 토씨 하나까지 야금야금 읽던 나와 달리 열무 다듬는 일에만 집중하는 줄 알았던 엄마는 결국 큰 결심을 했고 우리 집 마루에는 ‘계몽사 노란책’이 자리 잡게 된다. 노란색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그 책들에는 그 당시 흔히 보기 어려웠던 먼 나라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림이 특히 훌륭했다. 글 반 그림 반으로 채워진 그 책들은 낯설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셋방살이 요정 이야기, 외톨이 소녀가 불량해 보이는 이웃집 아이와 친해지는 이야기, 하늘을 나는 교실 이야기 등 아저씨 말대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들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은 책이, 별다른 서사 없이 그저 노는 이야기로 채워진 <즐거운 무우민네>이다.


그렇다. ‘무민’이 아니고 ‘무우민’이다. ‘햄릿’을 ‘해믈리트’로, ‘호머’를 ‘호우머’로 읽던 시절에 함께 한 책. 어쩌면 이제 와 무민을 읽는다는 건 열 살 이전의 나를 만나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민을 호명할 때 입술을 쭉 내밀고 느리고 게으르게 ‘무우~민’이라고 했다. 하마를 닮았지만 최선을 다해 귀엽게 태어나려 애쓴 것 같은 외양의 무민 가족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젊은 날의 자신을 기억하고 싶어 회고록 쓰는 데 매진하는 아빠 무민도, 신나게 논 날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오늘도 재미있게 놀았는지 물어봐 주는 엄마 무민도, 어쩐지 어리숙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무민트롤도 모두 ‘무우~민’이다. 그런데, 무민 가족은 이들이 다가 아니다. 무민 골짜기에 사는 이들 모두가 가족이다.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무민 집에 드나드는 무민의 가족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단연 스너프킨이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무민트롤이 하모니카 소리에 이끌려 달려갔을 때 강물 위 다리에 앉아있던 스너프킨은 말할 수 없이 근사하다. 예민한 음유시인 같기도 하고 고독한 방랑자 같기도 한데, 무민트롤과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하모니카를 부는 그 장면은 이상한 위안을 준다. 내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동안에도 내 친구는 내가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이 자리에 있었겠구나, 그러면 친구랑 같은 햇볕을 받으며 꿈꾼 이야기도 하고 앞으로 뭘 하며 놀지 계획도 세울 수 있겠구나, 언젠가 이 친구가 머나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려도 나는 이 강물과 바람과 햇볕을, 그리고 친구가 부른 ‘봄노래’를 기억하며 기다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된다. 또다시 봄이 되면 스너프킨이 휘파람 불며 창 밑으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스너프킨은 무민트롤에게나 어린 나에게나 뜻밖에 찾아온 꿈같은 친구였다.


물론, 스너프킨이 무민골짜기에 있건 없건 그곳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사건과 모험이 펼쳐진다. 뭐든 그 속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요술모자 덕분에 구름을 타고 신나게 놀아도 보고, 무시무시한 개미귀신을 조그만 고슴도치로 만들기도 하고 사전에 있는 낱말들이 벌레가 되어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것도 보고, 결국 그 요술모자를 크고 무서운 그리크에게 속 시원히 줘 버리는 일들. 그리크는 요술모자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무섭게 생기는 바람에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아 늘 외로웠을 그리크는 어쩌면 팅거미와 밥처럼 조그맣게 변신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아니다. 이건 각자 생긴 대로 잘 살자는 무민 정신에 위배되는 생각이다. 그리크는 버찌로 빨간 루비 만들기같이 엄마 무민이 가르쳐 준 것만 하며 어디선가 재밌게 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아주 심심해지면 무민골짜기에 다시 찾아와 으악, 하고 놀래키겠지.


그리크가 요술모자와 바꾼 가방에는 ‘왕의 루비’가 있다. 팅거미와 밥이 가방을 연 날 골짜기는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왕의 루비를 찾아 헤매던 마법사가 표범을 타고 빛보다 더 빨리 무민골짜기로 날아왔지만 팅거미와 밥이 왕의 루비를 돌려줄 리 없다. 실의에 빠진 마법사, 제안을 하나 하는데 골짜기 주민들을 위해 마법을 부리겠으니 소원 하나씩 말하라는 거다. 그래야 기운이 날 것이라면서. 저마다 소원을 하나씩 말하는데, 아빠 무민이 이런 말을 한다.


“자, 이제 내 차롄가 보군. 하지만 고르기가 무척 어려운걸. 생각나는 건 많은데, 딱 이거다 싶은 게 없네. 온실은 직접 만드는 게 훨씬 재미있고, 작은 배도 역시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뭐든지 거의 다 있고.”


어린 시절의 나라면 분명히 건너뛰었을 문장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이것이야말로 무민 이야기의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달리 소원이랄 게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매 순간이 최선이고 행복인 삶. 긴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면 골짜기 친구들과 안부 인사로 하루를 보내고, 마음 상한 친구 기분을 풀어주느라 모두 함께 애쓰거나,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식탁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삶 자체가 마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하모니카만 불어도, 먼 곳으로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무민 이야기는 말해 준다.


어쩌면 매사에 빠릿빠릿하지 못했던 나는 요술모자나 마법사 이야기에 빠졌다기보다 느긋한 골짜기 주민들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엄마가 열무 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괜히 재미있었던 꼬마가 성실한 외판원 덕분에 느리고 게으른 삶의 의미를 일찌감치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가 대책 없이 오늘만 사는 어른이 된 데엔 토베 얀손의 책임이, 스노크 아가씨의 앞머리 한 올만큼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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