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당무》(쥘 르나르 / 비룡소)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살면서 제일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배부른 몸으로 큰애, 작은애를 부여안고 우는 날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셋째가 울보로 태어난 것 같다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 말이 맞는 것 같다. 맞는데 하나 덧붙이면, 나에게 슬픔은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제일 좋아하는 공주가 인어공주였고, 소공녀 세라 이야기에 감명 받아 고아의 삶을 상상하며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엄마로부터 미움받는 홍당무를 만났을 때는 나를 구박하지 않는 우리 엄마가 심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쩌다 나를 콕 집어 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홍당무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잠길 수 있었다. 아직은 슬픔이 뭔지 모르고 <홍당무>가 호러물에 가깝다는 걸 알지 못했던 때의 일이다.
쥘 르나르의 <홍당무>는 19세기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 따르면 19세기 프랑스의 어떤 아버지는 가족보다 사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어떤 어머니는 신경이 늘 곤두서 있으면서 툭하면 자녀의 뺨을 때리는 사람이다. 소설에서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의 희생자는 막내아들인 홍당무다.
르픽 부인은 늘 홍당무에게만 가혹하다. 한밤중에 닭장 문을 닫는 것도, 아빠가 사냥해 온 자고새의 숨을 끊는 것도, 먼 데 심부름을 가는 것도 언제나 홍당무 몫이다. 형이 내려친 곡괭이에 이마를 맞아 피가 줄줄 나도, 르픽 부인은 그 모습에 놀라 기절한 형만 걱정한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아이가 흔히 그렇듯 홍당무도 밤에 배변 조절이 잘 안 되는데, 르픽 부인은 침대 밑 요강을 일부러 치워 실수를 하게 만들고 몰래 도로 갖다 놓는다. 그러고는 홍당무가 얼마나 힘든 아이인지 떠벌린다.
르픽 씨는 홍당무에 대한 애정이 있지만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른다. 홍당무와 르픽 씨의 대화는 번번이 어긋나는데, 둘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새 이가 나왔다며 기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기 이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우리 가족의 이 수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새 책을 사 달라는 편지에는 직접 써서 읽으라는 답장을 보낸다. 르픽 씨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애는 쓰지만 자기 세계에 빠져 온전한 조언과 격려를 놓치고 만다.
부모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사랑받기 위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는가 하면, 다른 아이의 흉내를 내다가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하고, 동물을 잔혹하게 죽이고는 악몽에 시달린다. 홍당무가 죽인 두더지와 고양이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홍당무 자신이기에 온전히 죽지 못하고 꿈속에서 홍당무를 괴롭힌다.
그러다 단 한 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 오는데, 홍당무가 처음으로 엄마의 심부름을 거부한 날이다. 홍당무는 르픽 씨에게 엄마에 대한 미움을 토로하고, 르픽 씨는 “나라고 네 엄마를 사랑하는 줄 아니?”라는 말을 불쑥 내뱉는다. 공명(共鳴)의 순간이다. 홍당무의 기쁨은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표현된다.
“마귀할멈 같으니! 그래, 당신 잘났어요. 난 당신이 정말 싫어!”
<홍당무>는 쥘 르나르가 겪은 일을 기록한 작품이다. 르나르는 부유하지만 화목하지 않은 집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이가 나빴고 그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타인을 향한 비난으로 불만을 해소하려 했고, 아버지는 사냥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비난과 회피는 결과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르나르의 어머니는 우물에 빠져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는 권총자살을 했다.
르나르가 불행을 물려받지 않은 비결은 홍당무의 외침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꾹꾹 눌러 온 감정을 온전히 표현했을 때의 후련함 말이다. 르나르는 비난도 회피도 아니라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홍당무>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간결하고 기지 넘치는 문체에 있는데, 이것은 문제를 넘어 선 후에 얻을 수 있는 관조에서 나온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르나르는, 고향에서 촌장이 되어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하다 지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