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수술 날 당일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직도 그때의 감정은 눈 감으면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로부터 두 달 동안 우리는 아빠에게 어떤 사실도 말할 수 없었다.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충격이 더해져 아빠를 더 일찍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고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질이 예민한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수술 후 처치가 사전에 설명과 달랐고, 계획했던 항암 치료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루는 퇴근 이후 엄마가 아빠에게 솔직히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내게 신호를 주었다. 우리가 출근해서 집을 비운 낮 시간에 아빠는 자기 상태를 솔직히 말해보라고 며칠 동안이나 엄마를 닦달했다. 더 이상 숨길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말을 전할 수 있을까? 끝날 것 같지 않는 고통스러운 시간, 여러 밤을 속 앓으며 고민했지만 여전히 아빠에게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려고 했다. 병원에서 받아온 인체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을 방에서 꺼내 왔다. 태연한 듯 방으로 가서 종이를 들고 나왔지만 가슴은 쿵쾅거리고 몸이 떨렸다. 숨을 누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조용히 아빠 곁에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막상 수술을 들어가 보니까 생각보다 수술이 까다로워서 암세포들을 전부 제거하지는 못했고 일부만 수술을 했어요.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관리를 잘하는지에 달려있으니까, 운동도 하고 건강한 음식 잘 챙겨 먹으면서 이겨내야 돼”
나는 결국 있는 그대로 아빠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빠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참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 나서 아빠가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죽더라도 분투하다 가야지” 그 말 이외에 말을 아꼈다. 그 말은 끝까지 병과 싸워 이겨내겠다는 아빠의 의지 같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빠 역시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살아오면서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몇몇 순간이 있다. 아빠가 떠난 뒤에 가장 후회가 남았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아빠의 몸상태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 못했던 그때다. 자신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했다.
긴 이별 앞에서 너무도 무지했던 나를 후회한다.
그때 우리 모두는 죽음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으며 애써 마지막까지 피하려 했다. 아빠가 두려움에 가득 찬 상태로 본인의 죽음을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도록 했다면, 주체적인 삶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좀 더 서둘렀다면 어땠을까. 후회도 자책도 컸다. 이제라도 모든 것이 처음이라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아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용서하고 싶다.
서울대학교 종양내과 김범석 전문의는 자신이 쓴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 치료를 받는다. 즉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그에 반해 서울대병원 통계상에서 환자들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 치료를 받는다. 삶을 정리하는데 고작 한 달의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 내가 만일 말기암 환자가 된다면 40년 조금 넘게 살아온 내 삶을 정리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적어도 6개월 이상은 필요할 것 같고, 누구든지 간에 두 달 안에 정리하라고 한다면 나 역시 화가 날 것 같다."
"환자에게 일찍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은 시간이 환자에게는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며 삶을 정리해나간다는 것은 극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분명히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깊어질 수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무한히 지속될 것 같았던 생이 유한하고 소중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은 분명히 변한다. 암환자의 경우 하루하루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내지 않고 누구보다 더 의미 있는 매일을 보낼 수 있으며, 암 병원에서 그 같은 실례를 보아 왔다."
덧붙여 서울대학교 병원 신경과 이승훈 교수는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병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좋아지는 줄 알고 착각을 하다가 돌아가시게 된다. 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해 끝까지 알 권리가 있고, 더 이상 치료보다는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죽음을 가까이서 다루는 의료진과 호스피스 종사자들이 책과 강연을 통해, 죽음과 삶의 마무리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모습을 보면 반가움과 동시에 감사를 느낀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처럼 속으로만 끙끙대며 애쓰는 사람들이 줄어들겠지 싶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