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인더 Mar 06. 2023

그는 내게 중요한 사람인가?

죽음을 사색하면 관계의 본질이 보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이렇게 날 멕여도 되는 거야?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

그에게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뭐, 그도 그다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그래, 그는 나에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리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나의 가장 큰 재산이다. 이것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동기인 동시에 때로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기질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강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소진시키는 관계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생에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누가 내 곁은 지켜 배웅해 줄까? 생각해 봤다. 중대한 장애나 질병으로 인해 얼굴이 붓고 화장은커녕 세수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민낯을 내보여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생각은 관계에 마음을 다치고, 감정이 소진되는 일을 꽤나 줄여준다. 적당히 잘 거절하는 법을 익히게 고, 불필요한 감정 소비를 억제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에 힘 빼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힘주지 마라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미워하기도 했다. 내 진심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외면하며 살았다. 사랑을 표현하기는커녕 서로 가슴에 상처 내며 살아왔으니 아빠를 떠나보낸 이후에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저리고 아팠다. 존재를 떠나보내는 일은 미움보다는 사랑했던 기억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누가 옳았느냐 보다 용서와 이해를 택하게 한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 낸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일부 내용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다양한 심리적 감정적 변화를 겪게 된다. 타인의 보살핌과 감정적 공감을 원했지만 아무도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 주지 않아 상심하던 이반 일리치는 병마와 싸우며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아들의 눈물이 자신의 손등에 흘러내리는 순간 이반 일리치는 환한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사람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언가 바로잡을 것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 순간 그의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코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는 가족에게 연민과 또 다른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아내에게 쌓였던 미움의 감정들은 죽음에 직면하자 측은지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용서해 줘' 하고 말했지만 그의 입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죽음의 순간 이반 일리치는 아들과 아내에게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난 잘못들을 바로 마주할 때 비로소 관계에 회복이 일어난다.     





말랑말랑한 인생을 위해!

죽음의 반대말은 '말랑말랑'이다. 죽음은 신체적, 심리적 정지 즉 '굳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파동과 생동이다. 멈추지 말고, 고이지 말고, 굳어지지 말아야지.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늘 말랑말랑해야겠다. 몸이 굳지 않도록 매 순간 세심히 살피고 가슴을 늘 활짝 펴고. 마음이 굳지 않도록 노랫소리와 내면의 소리를 자주 듣겠다. 말랑말랑한 생각과 태도를 위해서는 읽고 또 써야 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