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더 높이를 외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처럼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치워버리고 숨겨야 하는 것이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카지노에는 시계, 창문, 거울이 없다
대신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은 매우 능동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식사와 주류는 저렴하거나 공짜다. 허기를 느끼면 하던 일을 중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모든 것이 도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돕는(?)것이다. TV를 틀면 나오는 홈쇼핑 채널들은 늘 우리에게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방송인들의 피부는 세월을 비켜가는 것처럼 맑고 팽팽해서 노화는 마치 내게만 일어나는 일 같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나 '삶'이 아닌 트렌드와 명품이다.
가리고 숨기고 은폐된
내가 중학교 1학년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임종을 맞으셨고 장례식 역시 살던 시골집에서 3일 장으로 치러졌다. 할아버지는 명절날 차례를 지내러 종종 올라갔던 마을 뒷산에서 영면에 드셨다. 일 년에 딱 두어 번 정도 주로 명절에 뵙던 할아버지는 엄격하신 분이었고 손녀보다는 손자들을 더 애지중지하셨기 때문에 깊은 정을 나누지는 못했다. 다만 아빠와 할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에 나도 눈물을 흘렸다. 중학생이 바라보는 죽음은 생소하고 어색했다. 돌이켜 보면 불과 20년 남짓 지난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은 거의 사라졌고, 아이들은 충격을 받는다는 이유로 친지들의 장례식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 게 보편화되었다. 일상 속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하거나생각할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죽음을 알면 사는 게 변할까
게다가 한국은 현실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현실 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죽음이나 내세에 관해서는 관심이 적다. 물론 유교적 사상이 죽음을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고 충실하다 보면은 죽음에 대해서 자연히 알게 된다는 입장인 것이다. "미지생(未知生) 언지사(焉知死) 요.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는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제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죽음을 알아야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유한하며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번데기를 벗어던진 나비처럼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
사는 일만큼이나 죽는 일에 진심이라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이, 더 높이라는 말대신 과정에 집중하는 삶의 방식과 밀도 높은 충만한 관계를 나누는데 더 집중하지 않을까. 언제든 자연스럽게 드러내 대화 나눌 수 있는 분위기와 문화적 성숙을 바라고 꿈꾼다. 오늘도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 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내 쇼핑 장바구니에 담긴 수많은 리스트들이 대부분 실제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건은 내가 아니다. 소비하는 행위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꾸며 줄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들이 진정한 나는 아니다.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갖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렵고 의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