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본 인과관계의 사슬

조건과 선택의 맞물림

by witsfinder

신입사원 시절 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에서 근무했다. 강남역에서 국기원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골목에는 그리 크지 않은 빌딩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고, 그곳에 어학원이 몰려 있었다. 입사할 때까지 독해와 문법 위주로 영어 공부를 하다보니, 실제 원어민과 마주하면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조금 시간 여유가 생기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영어학원 한 곳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레벨 테스트에서 최하위 바로 윗반에 배정되었다. 학원은 수강생이 오래 다녀야 돈을 벌기 때문에 처음부터 높은 등급에 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반 수강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한 반의 수강생은 10명 이내 소수였다. 초등학교 교사, 대기업 사원, 명문 공대 출신 취업준비생, 모델 등 다양한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간혹 한두 번 외국인 강사가 나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런 때는 다른 반과 같이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날도 아일랜드인 강사가 나오지 않아 다른 층에서 하는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 시작 몇 분 전,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생리적 신호가 왔다. 복도 맞은편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칸막이 안에 앉고나서 잠시 후,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평온했던 일상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아찔한 위기를 직감했다. 칸막이 문 바로 앞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여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온 것이다.


그 건물은 층별로 화장실이 구분되었다. 홀수 층이 남자 화장실이면, 짝수층은 여자 화장실, 이런 식으로 좁은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평상시 내가 있던 강의장은 남자 화장실이 있는 층이었는데, 다른 층에서 합반하는 그날 아무런 생각 없이 관성처럼 몸이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였다. 칸막이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보려 몰려오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일이 좋지 않게 전개된다면 파출소에 잡혀가 경찰관 앞에서 결백을 입증해야 할지도 모른다. 몰래카메라 등 사건사고가 심각한 요즘이었다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도 모두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정말 다행하게도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학원은 다른 곳과 달리 모든 수업과 쉬는 시간이 동시에 운영된다. 수업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화장실과 복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점에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강의장으로 직진했다.


이렇듯 일상적으로 정해지는 조건과 선택들이 이어져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가 촘촘하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연속적인 사슬에서, 조건과 선택이 맞물리며 사건이 발생한다.


1996년 어느 날 있었던 개인적인 사건이다. 그 후 살아오면서 일이나 삶에서 이보다 훨씬 심각하고 큰 위기를 많이 만났다. 그때마다 어떻게든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관여하거나 돕기도 한다고 나는 믿는다.


튀르키예는 고대 그리스가 지배한 땅이었다. 그다음 로마가 지배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 유물이 같이 남아있다. 어느 지역에서 본 로마 시대 목욕탕 안의 화장실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무너진 유적지에 더 이상 지붕은 없었다. 수천 년 비바람을 견뎌낸 차가운 석재 변기 위로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대리석에 새겨진 승리의 여신 니케(Nike)가 가까운 곳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땅의 주인과 그곳에 머무는 문명이 바뀌는 것도 주어진 조건과 인간의 의지가 맞물려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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