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나를 반기는 도시
30kg이나 되는 짐 가방은 화수분이다.
끝도 없이 계속 계속 튀어나오는 짐이 지저분한 게스트하우스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짐 속에 개미가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하며 새벽까지 짐 정리를 했다. 난생처음 이용해보는 게스트하우스는 낯설고 햇볕이 들지도 않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그래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흘 예약해두었는데 벌써 내일이면 예약한 날이 끝이 난다. 잠깐 고민하다 날짜를 며칠 더 연장하기로 한다.
열심히 달력을 들여다보지만 자꾸만 오늘이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헷갈린다.
고작 이틀 만에 나는 시간을 버렸다.
늦잠을 자느라 방을 치우러 들어온 매반(메이드)을 돌려보내곤 잠이 깨어버렸다. 이곳 치앙마이의 여행자들은 꽤 부지런한가 보다. 아침 10시에 방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당황해하는 매반의 모습이 신기하다. 앞으로 며칠. 난 매일 아침 그녀에게 청소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쩌지?
느지막이 씻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쏴아 쏴아 저 소리는 빗소리였구나. 닫힌 문 안쪽에서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구경한다. 공항에 나를 데리러 와주었던 장기투숙객이 오늘은 맥가이버를 자청하고 있다. 어디 가는거냐며 걱정을 하는데, 그렇다. 나는 그 흔한 여행 책자 하나 없이 치앙마이를 여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센탄 백화점에 가는 길을 물으니 게스트하우스 위로 두 블록 가서 골목길 끝에서 다시 어쩌고...... 설명은 명료했으나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골목이 끝나는 길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익스큐즈미- 빠이 센탄 유티나이카?(실례합니다. 센탄 백화점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마주한 사람들이 열심히 길을 알려주어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엉망으로 놓인 화분으로 가득한 정원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며 남의 집을 흘깃거리며 길을 걸었다.
15분쯤 걸릴 거라던 게스트하우스 그분의 시계와 나의 시계는 달라서, 나는 한참을 골목골목 헤매고 다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분명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겠지만 처음 길을 묻기 위해 귀에서 빼낸 순간부터 나는 다시는 그것을 귀에 꽂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사람들을 잘 들을 수 있었다.
그다지 볼 것 없는 백화점 구경을 끝내고 나오는 길 백화점 앞 공터가 노점으로 변해있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내가 가까이 가자 입을 딱 닫아버린 두 명의 아가씨들 옆에 앉아 노점이 서는 것을 구경했다. 어제저녁 골목을 훑고 다닐 때도 찾지 못했던 돼지고기 꼬치를 찾았다. 고기가 익을 때까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가 가장 먼저 달려가 샀다.
2003년 방콕에선 꼬치 두 개에 찹쌀밥 한 개면 15밧으로 한 끼를 때웠는데 오늘의 치앙마이에선 꼬치 일곱 개에 찹쌀밥 한 개면 25밧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 물론 크기도 다르고, 샀다고 해서 일곱 개를 다 먹는 건 아니지만 거하게 한 상 떡 벌어진 상만 밥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지난 몇 년의 행적을 볼 때 참으로 검소한 한 끼임은 틀림없다. 가리지 않고 거리 음식을 이렇게 잘 먹는 나에게 입이 짧다느니, 편식 쟁이라느니 하는 말은 대체 누가 하는 말인지 모르겠네 들어주는 이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여유로운 한 끼를 먹는다.
하늘이 뚫린 노천에서 발 마사지를 받으며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지금 비가 오면 참 좋을 텐데 생각도 해보고 살짝 과한가 싶은 금액의 팁을 건네고 감사 인사를 한다. 돌아오는 길은 썽태우를 타보기로 한다. 사람들 하는 양을 잘 보다가 택시를 세우듯 손을 들어 차를 세운다. 그런데 아무도 하옉 산티탐으로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기서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친절한 경찰 아저씨에게 가서 물어보니 택시를 타라고 한다. 택시가 비싸다고 버스를 타겠다고 하니 버스는 안 간단다.
차라리 걸어가겠다는 심산으로 길을 건넜는데 경찰 근처에 있던 썽태우가 유턴을 해서 내 앞에 세우고는 20밧이라고 한다. 그는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폴리스, 배드(Bad)"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아이 노(Know)" 맞장구를 쳐주며 썽태우에 올라탄다.
경찰에게 가기 전 내 타깃이 되었던 교복 입은 소년이 타고 있다. 썽태우 세우는 거 보고 포기하고 경찰에게로 간 거였는데 이렇게 같은 차를 타게 된다. "너 고등학생이니?"하고 시작된 질문에 의외로 그는 굉장히 열심히 이야기를 받아준다. 대부분 고등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사립학원에 가는 일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아마도 있는 집 자식이겠지. 오늘은 파티가 있어서 집에 가서 씻고 치장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그 애에게 최고 멋지게 꾸미고 가라고 응원해주었다.
맛이 없어 이틀 연속 실패 중인 쏨땀과, 닭똥집도 섞어서 사올걸 그랬다 후회했지만 그래도 맛있었던 무삥(돼지고기 꼬치)과 찹쌀밥이 오늘의 저녁. 42밧주고 사 온 망고와 42밧짜리 망고를 깎기 위한 69밧짜리 과일칼,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는 간식으로 저장. 저녁 여덟 시. 참으로 어영부영. 시간이 잘 간다.
다시 한번 나선 마을 탐험. 어제는 치앙마이 도착 직후 짐 풀고 저녁 먹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 한참 헤맸는데 오늘은 머릿속에 단단히 위치각인. 로터리 오거리 중 두 개를 둘러보았다. 한 개는 오늘 백화점 가는 길에 들러보았고, 이제 두 개 남았다. 연유 듬뿍 로띠를 사 먹을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계속 배가 고파하는 나의 위장에게 너무 호사인 듯싶어 노란 옥수수 두 개를 잘라달라고 해서 가져와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여행이 외로운 이유는 부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
방콕에서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2시간 반 동안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곳.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곳. 다만 내가 선택한 곳.
이틀째의 밤.
치앙마이. 나를 반기는 도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