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27-3) - 여섯 번째 수다모임

10월 29일 오전 열 한시 여섯 번째 수다모임(3)

by 서화림

상담 중에는 꺼놓거나 진동으로 해놓기로 했던 핸드폰을 꺼내 뒤적이던 가브리엘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아닙니다만 저장해둔 글이 있어서 읽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급해선지 지금은 못 찾겠네요. 대충 내용만 전달하자면 사랑이 부족하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사랑을 주는 게 정신병 치료에 제일 기초적인 치료 방법이다. 사랑이 효과가 있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알고 있던 말이라는 듯 연마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귀에서 가브리엘님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제가 이 글을 읽은 건 누나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누나는 심각한 우울증과 정신분열을 앓고 있어요. 몇 번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매형은 누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었어요. 누나가 도망치듯 시집간다 했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겨우 면회가 된다고 하기까지도 한참 기다렸어요. 통통하던 볼이 못 알아볼 정도로 말랐더군요. 그래도 저를 알아보기는 했어요. 정환아, 정환아. 이름도 불러 줬었죠. 누나를 보고 와서 저는 한동안 우울증, 정신분열 그런 것들에 대해 검색을 엄청 했었어요. 아마 그때 본 글일 거예요. 보자마자 마음에 팍 와닿아서 저장해뒀었어요. 그런데 너무 오래되어선지 찾지를 못하겠네요.”

가브리엘이, 아니 정환이 바닥을 보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누나는 우리 형제 중 아버지를 가장 미워했어요. 어쩌면 엄마보다 더 싫어했을지도 몰라요. 누나가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싫어할 이유는 없었어요. 더 당한 건 우리니까요. 물론 딸한테는 손 안 댄다 그런 건 아니었고요. 우리가 누나를 보호했어요. 여자니까요. 아버지도 누나보다는 엄마나 아들들을 더 많이 때렸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를 가장 싫어하는 건 누나였단 말이죠. 누나가 남들보다 빨리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제가 반대를 얼마나 심하게 했었는지 몰라요. 매형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있지만 누굴 데려왔다 쳐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아버지 밑에서 모진 세월 살고 이제 성인이 되었는데 자기 인생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또 누구 그늘로 간다니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누나가 그러더라고요. 거기 가서 못 받은 사랑 다 받으며 살고 싶다고. 그때 알았어요. 아버지는 우리 자식 셋을 모두 사랑에 환장한 병신 쪼다로 만들었구나. 그리고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누나를 말릴 수 없겠구나. 그렇게 누나가 시집을 갔죠.”

옆자리의 엘리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볼이 눈물에 젖어 반짝이고 있다. 그녀의 훌쩍이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런데 매형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어요. 누나는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 같은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 거예요. 그 지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거죠. 거기가 천국인 줄 알고. 몇 번이나 도망왔다가 잡혀갔어요. 말이 잡혀갔다지, 언제 허겁지겁 도망왔냐는 듯 매형이 문지방만 넘어 들어오면 바로 따라나섰어요. 친정 나들이 온 새댁처럼요. 가난한 집에서 마냥 누나를 품어줄 수만도 없었죠. 아버지는 울타리가 되지 못했고 엄마는 딸의 불행에 손을 놓고 있었어요. 맞서 싸우려는 저를 번번이 엄마가 말렸어요. 평생 같이 살 거 아니면 나서지 말라고 그랬어요. 매형을 보면 싫은 내색을 숨기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어요. 누나는 도망까지 와서도 절대로 매형 얘기를 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누나는 아이를 낳았고 누나의 불행도 더 깊어졌어요. 혼자서는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는데 둘은, 셋은 버거우니까요. 누나는 꼭 엄마 같았어요. 자기 아이들에게 큰 모성애가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건 충실하게 했지만 사랑을 준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우리 엄마처럼요. 저 글을 본 순간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저 글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과 누나가 원하던 사랑이 누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었다는 것을요. 또 누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 거라는 것을요. 누나는 사랑받지 못할 테니까요. 누나는 저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챈 게 틀림없어요. 누나는 절망에 빠진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누나를 찾아가지 않아요.”


가브리엘의 말이 끝났다. 그의 눈이 빨갰다. 하지만 그는 끝내 눈물 흘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이 가진 불행의 무게만큼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아 발개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엘리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오늘 그녀는 나를 대신해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가브리엘을 대신해 울어주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문득 은하가 입을 열었다.


“남편이 사랑 어쩌고 할 땐 진짜로 듣기 싫었는데 애들한테는 일상적으로 사랑한다 해요. 말로 해본 적은 없지만 부모님도 사랑하고 형제 자매도 사랑하고요. 아마 제 아이들도 제 부모님도 제 형제 자매도 저같이 저를 사랑하고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제 식구의 지지가 꼭 필요하거든요. 남편이 저 꼴값을 떨어도 부모님 계시니까 차고 나올 생각도 하고 붙어살 생각도 하는 거죠. 그거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아서 가브리엘님이나 가브리엘님 누나의 절망이 어떨지도 상상이 가질 않네요.”

“그런데 은하님은 어째서 남편의 사랑 고백에는 그토록 냉담하실까요?”

연마담이 물었다.


“그러게요. 사랑도 질이 있을까요? 가족의 사랑은 고급이고 남녀의 사랑은 아닐까요? 남편 만나기 전에 몇 사람 만나기도 했는데 심장이 떨리도록 좋아한다는 감정은 가져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상대방이 내가 좋다고 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봤고 이런저런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아서 만난 거지 너무 좋고 사랑한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저는 이성적인 제 성격 탓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이런 타입의 인간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요. 불타지는 않지만 안정적이기는 할 거니까 장단점이 있고 생각했어요.”


“개똥이님은 어떠세요?”

“남편이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저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어요. 결혼 자체를 하고 싶다는 바람과는 별개로 이 남자가 그 남자일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그리고 남편은 정말 간단하게 제 마음을 진단해줬어요.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그래서 저는 남편이 내려준 확신을 근거로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남편을 좋아하는 게 맞았어요.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그런데도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있죠.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남편을 일종의 도피처로 선택했던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또 남녀 간의 사랑도 갈망했어요. 완벽한 보호가 이루어지고 나자 사랑이 문제가 된 거예요.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 여겼으니까요. 애초에 부모같이 든든한 상대를 골라놓고선 이제 와 애인이 되라니. 아빠와 애인은 양립할 수 없잖아요? 사랑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부모에게 못다 받은 걸 얻어낼 상대로 남편을 찍은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이제 남편의 보호보다는 남편의 사랑이 필요해요. 간절하게요. 그게 없이는 살아갈 가치조차 없다고 느껴요.”

“와, 개똥이님 보기와 다르게 되게 열정적인 타입이셨구나.”

어느새 눈물을 그친 엘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는요, 엄청 사랑이 많아요. 양다리를 걸쳐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애인이 없어 본 적도 없단 말이죠. 헤어질 땐 재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귀면서는 모두 다 사랑했어요. 친구도 많아요. 친구도 다 사랑해요. 가족도요. 늘 현재에 충실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도 특별하게 더 사랑해본 적은 없는 거 같아요.”

“그건 엘리님이 예쁘니까 그렇죠. 예쁜 여자 옆에는 늘 남자가 꼬이기 마련 아니에요?”

엘리의 말이 끝나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제 얼굴도 예쁘지만 제가 매력적인 거라고 해주면 안 될까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새침한 표정으로 엘리가 말했다. 오오, 하며 엘리의 자신감에 감탄을 표하니 엘리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저도 알아요. 저 예쁜 거. 옆에서 자꾸 예쁘다고 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것 때문인지 남자친구 없는 때가 없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늘 마음속으로 이 정도 좋아하면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 하면서 스스로 의심을 했던 거 같아요. 지금 남자친구도 그래요. 좋아는 해요. 좋아는 하는데 결혼은 그거보다 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받는 게 너무 익숙해서 주는 걸 잃어버렸나? 그래도 확실한 건요, 사랑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꼭 필요한 건 맞다고 생각해요. 아니, 인간이 손 두 개, 발 두 개인 게 이유가 있어요? 손가락 열 개인 건 뭐 이유 있나? 있으니까 있는 거지. 나중에 천국에 가면 이유를 알려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모르니까 모르는 거로. 하지만 한 개라도 없으면 부족하잖아요. 발가락도 요 쪼그만 게 한 개라도 없으면 균형을 못 잡는다면서요? 사랑도 그런 거 아니에요?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고 없으면 아쉽고.”

“엘리님 오늘 말씀 진짜 잘하시는데요. 귀에 쏙쏙 들어와요.”

내가 감탄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생동감 있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니 고맙다. 느닷없이 주어진 질문에 답만을 생각했지 근본적인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마감기한 맞춰 숙제 제출하듯 급급했다. 나의 칭찬을 들은 엘리가 기뻐한다.


“답을 알려드리기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각자 다른 종류 같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같은 고민을 안고 계시는 거예요. 이 모든 고민은 ‘사랑’을 둘러싸고 벌이는 자기와 싸움이죠. 늘 상대가 있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결과적으로는 항상 나와 어떠한 문제, 일대일의 싸움이죠.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도 남은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네요. 오늘 모임 마치며 소감 한마디씩 돌아가며 해볼까요?”


“개똥이님, 저 피부과 다녀요.”

느닷없는 은하의 말에 엘리가 얼굴 가득 호기심을 안고 이야기를 듣는다.

“지난주부터 안색이 좋아진 건 피부과 시술받아서 그런 거예요. 자외선 많은 곳이라 피부가 금방 상한다고 그래서 피부과 등록했거든요. 괜찮은지 모르겠던데 얼굴 좋아 보인다는 말 들으니까 열심히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궁금하면 물어보세요. 센탄에 있는 피부과예요. 여기서도 가까워요.”

은하의 비밀이 풀렸다. 원래도 하얀 피부지만 관리를 받으니 더 좋아 보였나 보다. 나도 언제 한번 가 볼까 호기심이 생긴다. 은하의 볼에 살짝 내려앉은 주근깨를 본다. 나는 주근깨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언제까지나 소녀 같아서. 하얗고 고운 얼굴에 주근깨를 뿌린 근엄한 소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나도 마주 웃었다.


“남편 혼자 두고 오는 게 마뜩지 않아서 오늘 빠질까 고민 많았는데 그래도 와서 여러분 만나고 얘기 나누니 좋네요. 뭔가 남편 뒷담화 한 것 같은 기분도 드는 게 어쩌면 집에 있는 남편이 귀 후비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말하고 나서 후련한 것보다는 좀 무서운? 아뇨. 무서운 건 아닌데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네요.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나의 말이 끝나자 엘리가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사랑 얘기할 때 말 좀 잘했죠?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말 한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어요. 가브리엘님 누나 얘기 들으면서는 너무 슬펐지만요. 저 여기 모임 정말 좋아요. 진짜 맨날 올래요.”

“오늘도 제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사연 있게 살았다고 생각 안 했는데 여기서 말을 하면 할수록 말할 게 생기네요. 다음 주에는 좀 더 잘 듣도록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엘리가 에이, 네 명밖에 없는데 한 명씩이나 입 다물면 어떡해요, 하고 수선을 떨었다.


“오늘은 전체적으로 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이네요. 여전히 엘리님은 상담 내용보다는 잡담과 리액션에 조금 더 강세이긴 하지만, 힘을 내서 좀 더 다가와 주세요. 이번 모임이 끝나면 11월이 되어야 얼굴 뵙겠네요. 저희 집 아이들이 벌써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데 11월에는 러이 끄라똥도 있죠. 조용한 치앙마이가 여러모로 시끄러워지겠네요. 저는 러이 끄라똥이 처음인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러이 끄라똥 되면 까페 디짜이에 모여 폼(불을 붙여 띄우는 일종의 연)이라도 띄울까요? 모두의 소망을 담은 폼이 성공적으로 치앙마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다가오는 러이 끄라똥과 다가오는 11월을 까페 디짜이에서 마중하고 있겠습니다. 가시는 길 살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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