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아버님은 뽑기 왕

뽑기 왕을 시아버님으로 맞이한 여자

처음 시아버님을 뵈었던 건 18년 전 이맘때쯤 이였다. 퇴근길에 남편이 말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러서 공부 조금만 더 하고 갈래요?"

"집에요? 부모님 집에 계시지 않아요?"


그때 회사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가르쳐 주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한 것이다. 당시, 남편(당시남자친구)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저녁시간에 어른이 계신 집에 간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갑자기 아버님께 전화를 하더니,

"아빠! 30분 안으로 도착할 건데요 누가 같이 갈 거예요~"

"엥? 지금 집에 전화하신 거예요? 이 저녁시간에 예의가 아닌 거 같아요."

"괜찮아요~ 이미 간다고 말했으니깐 잠깐 차 마시고 공부해요~"


어버버 하다가 결국 남자친구의 집에 가게 되었다.

들어가자마자 현관에 놓여있는 많은 신발에 눈이 휘둥그래 해졌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시부모님을 비롯해서 근처에 사는 시누네 와 어린 조카들까지 와있었다. 남편에게는 이미 계획이 있었던 듯했다. 당황한 나는 어리둥절했다.


남편의 이끌림에 따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속으로는 더 늦기 전에 대문을 박차고 나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아버님께서 나를 조용히 서재로 부르셨다. 이 상황이 꿈인가 하는 착각과 함께 남자 친구와 홀린 듯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책상 위 큰 종이 박스를 내쪽으로 밀어내시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인형 좋아하나?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요"

25세 성인 여성에게 인형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남자 친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 우리 아빠 취미가 인형 뽑기라서요.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요 여기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책상 옆에 저 상자들 안에도 이것저것 있으니까 가져가도 돼요"


나는 고개를 돌려 책상 옆 창가에 놓인 정체 모를 박스들을 보았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저렇게나 차곡차곡 쌓여 있는 상자들이 전부 인형 뽑기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랬다. 아버님은 인형 뽑기의 달인이셨다. 그 수준이 일반인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 뽑는 그런 인형들만 있는 게 아니라, 라이터, 거울, 액세서리, 키링 같은 평범한 물건들부터, 시계, 애니메이션 피규어, 고혈압 측정계, 혈압계와 같은 의료용품 등등 아주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상자들은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손님이 오면 선물로 내어주신다고 하셨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뽑으려면 하루 이틀 하신 게 아니실 텐데, 게다가 종류별로 구분해 놓은 박스들을 보니, 실력자의 포스가 느껴졌다. 남편이 상자 뚜껑을 열다가 책상 위에 파란 종이뭉치를 건드렸는데, 떨어져서 주우려고 보니, 천 원짜리 신권 지폐였다. 남편이 지폐를 주우며 내게 말했다.


"아! 이거 천 원짜리 신권인데요. 이렇게 신권으로 바꿔놔야 기계에 잘 들어간다고 매번 이렇게 바꿔놓으셔요" 고개를  끄떡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르신 취미가 뽑기라니... 고수시라니...게다가 이런준비성까지...'


아버님의 첫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 했다. 남친의 게획대로 남친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과,  아버님의 며느리가 되어, 함께 뽑기 투어를 다니게 될 거라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시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