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슬기 Jul 25. 2019

비가 내리는 날에

잠들기 아쉬울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잠에서 깨어날 때는 충분히 잤는데도 이른 아침, 그리고 어젯밤 잠자리에 드는 것을 아쉽게 만들었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꼈을 때.


제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의 한 장면입니다.

묘하게 수줍어지는 기분이지만 그런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비가 내리는 날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처럼 비 내리 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만 보아도 빗소리 ASMR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죠.

다소 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으나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상종 못 할 녀석이로군!” 하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라 믿고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평소 심심함을 못 견디는 성격은 아니지만-어쩌면 늘 뭔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특별한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늘 가진 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라면 거의 모두 바라 마다치 않을 공휴일 같은 날 말이죠. 공휴일과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것과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를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행동의 변화가 온다는 점입니다. 때에 따라서 공휴일이든 비가 내리는 날이든 간에 이래저래 곤란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긍정적이지 못한 영역을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비가 내리면 나와 대부분 사람들에게 행동의 변화가 온다는 점, 그것 하나만으로도 특별한 일이 생긴, 특별한 날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대응을 한다는 점에서 묘한 공감대를 느끼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비가 내리는 것에 대응하는 방법으로는 우산보다는 비옷이라던가 표면이 왁스 칠 처리된 바버 사의 재킷과 모자 그리고 방수 기능을 가진 부츠를 착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착장을 늘 갖고 다닐 수도 없고 때를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어쩌다 집을 나서는데 마침 비가 내려 “드디어 오늘이군” 하는 날이 찾아와 착장을 갖추고 나가더라도 겨우 왁스 칠 처리된 옷과 방수 부츠를 신고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걷고 다닌다면, 아무래도 좋지 못한 인상은 물론 어느 곳에도 환영받지 못하겠지요. 게다가 영국 신사의 멋을 머금은 007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외모와 체격도 갖추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비에 젖은 쥐의 모습일 뿐…. 애써 챙겨 입은 착장이 무색해짐은 물론 왁스 칠 처리된 바버 재킷에 흐르고 있는 빗물은 곧 눈물이 되어 흐르겠지요.

그림. 홍슬기

이 정도면 “역시 이상한 사람이군.”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결국은 비가 내리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우산을 챙기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어쩌다 우산도 없이 비가 쏟아질 때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게 되는데, 우산을 펴는 중에 비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나는 비옷을 선택할 용기도 없는 놈이군” 하고 자책한 적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비 내리는 날 저의 욕망을 펼치지 못하며 소심한 모습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비 내리는 날은 저에게 역시나 ‘특별한 날’입니다. MMORPG 게임에 등장하는 버프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버프는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해주는 것을 말하는 데요, 비가 내리면 저는 마치 버프 효과를 받은 것처럼 몇 없는 능력이 향상됩니다. 일단 저는 감수성이 올라갑니다.-그렇게 느낍니다-올라간 감수성으로 무엇을 하는가 하면 커피나 차를 마시며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본다거나 앞날에 대한 걱정들을 손에 잡히지 않는 지우개 같은 것으로 꾸물꾸물 지우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어느새 편안해지고 육체도 나른해집니다. 

그 결과 놀라울 정도로 질 좋은 수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강한 천둥 번개가 함께하는 날이면 중간에 깨어나기도 합니다.) 결국 잠이 잘 온다는 얘기 같지만 잠이 드는 과정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제야 말씀드리지만 스트레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기면 잠을 못 자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깊은 잠을 자게 됩니다. 겨우 비 내리는 정도로 스트레스 같은 것은 잊고 잠드는 주제에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자의적, 타의 적으로도 예민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 부류입니다. 그런 제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잠을 곧잘 잔다는 것은 저만 느끼는 것이겠지만 굉장한 일입니다. 그리고 비 내리는 날 카페 창가에 앉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런 날이면 학습능력이 좋아지는 느낌이랄까, 책을 읽어도 이해가 빠르게 되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나갑니다. 뭔가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의 분위기 같지만 안심하고 읽어나가셔도 됩니다. 

저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날에 대해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경험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저처럼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비 내리는 날은 싫어”라고 하셔도

뉴스에서 “앞으로는 비가 내리는 일은 없게 됐습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올 것 같지도 않고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군요.

저처럼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많은 스트레스가 닿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하던 일을 한 박자 늦춰야겠군 하는 생각을 할 때, 그 여유로움이 좋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