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2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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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수요일,
남편이 가고 나서 다시 눈을 붙였다.
수면안대까지 눈 위에 올려두고 세상 깜깜하게 잠이 든다. 난 요즘 또 뭐에 쫓기고 있는 건지 도망치고 다치고 숨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꿈이라서 다행이긴 했지만, 눈치 없이 격한 꿈자리에 심신이 지친 아침이었다. 왜 이리 피곤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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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122일 차.
자리를 박차고 운동을 나갔다. 오늘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몸을 풀었다. 이모들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도 잘 들렸기에 몰입하고 말았다. 운동 외에 노래교실과 하와이춤(훌라춤)을 배운다는 A, 다이어트 댄스를 다니고 있다는 B의 경험담으로 이미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다음 주제는 메뚜기. 메뚜기 체험을 하러 가고 싶다며, 어디에 가면 메뚜기를 한 포대 잡을 수 있다는 정보 나눔, 그리고 볶아먹으면 고소하고 맛있다는 맛 나눔까지.. 공감하진 못했지만 충분히 흥미로웠다. 습도가 높은 날엔 땀을 빼어줘야 한다며 복근 운동도 백번, 요가 동작도 쉼 없이 이어졌다. 나 오늘도 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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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오늘 하루는 절식을 할 생각이었다.
살이 다시 찌고 있고 하루쯤은 참아서 먹는 걸 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가이모의 갑작스러운 카페 데이트로 거절을 하지 못했다. 보통 커피만 마시던 이모는, 나의 계획을 알았는지 생각지도 못한 허니브레드까지 쿨하게 시켰다. 어쩔 수 있나. 오늘 절식 안 하는 거지 뭐. 보슬보슬 내리는 날, 커피 한 모금과 달콤한 빵은 정말 정말 맛있다. 꿀맛을 이럴 때 표현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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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치즈달걀말이, 미역국, 묵은지 무침.
매실을 제외하고 밑반찬이 똑 떨어진 우리집 냉장고. 멸치볶음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내가 만든 건 맛이 없다. 남이 만든 게 맛있어서 시도하고 싶지 않다. 둘이서 외출한 김에 내일 먹을 재료를 사 오기로 한다. 뭘 만들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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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구두구 대망의 콘서트 티켓 오픈.
동률님을 만날 수 있을까. 알람을 3개나 맞춰놓고 기다리는데 왜 이리 떨리는지. 남편이랑 번개를 뚫고, 대차게 내리는 비를 가로질러 피시방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행운을 주던 맨유피시방은 사라졌고,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부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콧노래가 흘러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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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도로는 온통 물바다였는데 신발이 젖는 걱정도 없다. 오히려 물 웅덩이에 첨벙첨벙거리며 걸어 다녔고, 우산을 삥삥 돌려 남편의 뒤통수와 등을 향해 물방울총을 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가자미눈이 되어 있다. 그러다 남편은 내게 복수를 했지만 둔한 이숭이는 복수인지도 모른다. 그 상황조차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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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티켓팅 시작.
익스플로러와 크롬창 두 개를 띄웠다. 폰 어플도 켜놓고 카운트다운을 기다린다.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앞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부터 심장이 떨려서 얼굴도 빨개진다. 교만하게 금, 토요일, 앞좌석을 논하던 이숭이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아무 날이나 걸리기만을 바랐다. 남편이 먼저 폰으로 성공했다. 나는 조바심 나지만 마우스를 사정없이 휘갈겼더니 성공. 오, 내 손에 티켓이 들어오다니.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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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충전했던 피시방 카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은 총싸움 게임을 하던데,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또 티켓을 구할 수도 있으니 노력을 했다. 온통 회색빛이었지만 내겐 티켓이 들어왔으니 됐다. 그거면 됐다. 긴장이 풀렸는지 배가 고파진다. 두리번거리다 피시방 메뉴판을 보며 감탄만 하다가 나온 두 사람. 세상 참 좋아졌구나. 떡국이랑 덮밥을 피시방에서 먹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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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도 물장난이 멈추질 않는다.
첨벙첨벙 물웅덩이 싸움 플러스 우산 물방울총도 그대로 했다. 한참을 놀다가 통증이 느껴진다. 슬리퍼가 적응이 안됐는지 발등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물집까지 잡혀서 슬리퍼를 오른발 왼발 반대로 신고 집까지 걸어온다. 레옹처럼 장본 재료를 품에 안고 오는 레옹 남편과 당당하게 걷는 마틸다 이숭이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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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캬캬.
시도 때도 없이 콧노래가 나온다. 티켓을 거머쥔 승자는 이런 기분이겠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배고픔에 핫도그를 바삭바삭하게 데워 먹었다. 축배인 양 맥주 한 잔씩 따르고 짠-하는 기쁨의 10월 2일. 이제 내가 할 일은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콘서트까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일. 캬. 벌써 11월이 기다려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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