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운명적인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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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수요일,
으아아아.
변명 같겠지만 흐린 날,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액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흐물흐물 이숭이 액체설. 오늘도 그랬다. 회색빛 하늘과 컴컴한 바깥에 그만 늦잠을 자버린다. 남편이 회사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도 못 보고 10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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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안 갔으니 음식이라도 덜 먹었어야 했는데..
밥을 야무지게 차려 먹는다. 저녁엔 적게 먹어야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운동을 갔다가 시장에 들러 과일이랑 시금치를 사고, 철물점에 가는 거였다. 철물점이라도 가야겠다. 오늘도 민낯으로 잘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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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는데 그 근처에서 삥삥 돌고만 있었다. 상호명 대신에 주소를 찍었더니 제대로 알려주는 기계여. 철물점 앞에서 아저씨 직원분이 주차를 봐주신다. 나의 감각에 의존해서 후방 주차를 아주 쿨하고 멋들어지게 하고 내렸다. 주차를 정말 잘한다는 칭찬에 90도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로 들어갔다. 샤워기 부품만 따로 팔지 않아서 테이프만 몇 개 사서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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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잠깐 통화를 했다.
5시 반이면 저녁식사를 하는 부모님. 딱 그때 전화를 걸면서 꼭 지금 뭐 하고 있냐며 물어본다. 오늘도 식사 중이었고, 보통은 뭐 드시는지 물어보곤 하지만 그것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어제에 이어 전화를 끊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시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나도, 미투’라고 하시지만, 그 마음은 다 느껴졌다. 알라뷰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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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는 김치볶음밥.
어제 해놓은 밥이 있어서 묵은지랑 신나게 볶을 생각이다. 햄도 쫑쫑, 김가루도, 파, 치즈, 후라이까지 넣었다. 이 정도면 맛이 없을 수 없는 맛인데 왜 이리 삼삼한거지. 마법의 굴소스가 없어서 그런가. 대신에 간장을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을 펐다. 간이 조금 맞았지만, 이 맛이 아니야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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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10화를 봤다.
박력 터지는 용식이 덕분에 둘 다 설레는 모습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강하늘 배우의 재발견이랄까. 원래 연기를 잘했지만, 뭔 사투리를 저렇게 잘 쓴디야. 표정이 살아있다. 말을 할 때 입술, 입모양이 활발하다. 볼 때마다 대단한 용식이. 한 시간이 후딱 지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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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운동장에 뛰러 가자는 남편.
그리고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이숭이.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다. 잠깐 잔 줄 알았는데 몇십 분이 지났고, 얼굴엔 손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처음에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남편은 열심히 뛰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한 바퀴를 돌고 왔다. 더 뛰고 싶지만, 지난봄에 무리한 운동?으로 늘어난 인대를 생각하며 몸을 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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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까지만 해도 덥다고 난리였는데 찬 바람이 부는 가을밤이었다. 초록초록하던 잎들이 울긋불긋 변신하고 있다. 저벅저벅 걷는 길, 바닥엔 갈색 낙엽들이 발에 걸리기 시작했다. 더 추워지면, 선선한 가을이 그리워지겠지. 따사로웠던 봄볕, 뜨거웠지만 냉수 샤워를 하던 여름날, 알록달록 산책길을 사랑하게 만드는 가을, 우리의 2019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