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2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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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일요일,
자기 전에 부엌에 다녀왔다.
재빠르게 젓가락으로 호작질을 하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온다. 아침에 남편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부엌 불을 켰다. 궁금했던 호작질의 결과물. 그렇다. 또 바나나에 사랑을 새겼다. 이번에는 우리 그림이랑 ‘사랑해효’를 적은 글씨와 함께. 젓가락으로 꾹꾹 쓴 부분만 새카맣게 바뀐 바나나는 하룻밤 사이에 사랑을 더 숙성시켰다고나 할까. 바나나로 사랑을 전하세요 여러분. 재미있고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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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도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러 갔다.
양말이랑 물 한 잔, 그리고 바나나를 챙겨주고 문 앞에서 배웅을 했다. 10시 넘어서 일어난 나는 남편이 올 때까지 혼자 시간을 보낸다. 평일 같기도 한 오늘. 어제 공수해온 식빵을 굽고 치즈랑 카야 버터를 슥슥 발라 먹는다. 부족하다 싶을 땐 밀감이 최고지예.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밀감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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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배달부 키키’를 봤다.
오메, 1989년 작품이라니. 그 시대 애니메이션이 너무 세련돼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튜디오 지브리는 내 마음을 몽글거리게 하는 강렬한 뭔가가 있다.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잘 표현하고, 섬세한 감정과 귀여운 등장인물들. 마루 밑 아리에티도 사랑스럽더니 마녀 키키도 꽤 귀엽다. 여기서 나오는 건물 지붕들이 주황색이길래 유럽 어디인지 궁금했는데, 스웨덴이라고 한다. 건물들이나 분위기가 더 정교하게 느껴지는 건 감독이 직접 도시를 답사하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캬.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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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돌아온 남편은 톱질을 끝내고 함께 라면을 끓여먹는다. 떡국이랑 라면 중에서 강한 지지를 얻은 신라면. 호로록호로록 맛 좋은 라면이 우리를 유혹해. 미역이랑 달걀도 넣고, 쌈배추를 꺼내서 열심히도 먹었다. 헤헤. 일요일 밤을 장식할 영화 ‘방황하는 칼날’ 그리고 밀감 파티. 이번 주도 참 괜찮은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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