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5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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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목요일,
어제 11시쯤에 누워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우리는 피곤대마왕이 되었을 거다. 알람을 끄고도 한참을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부담스럽게 푸석푸석한 사과를 깎는다. 칼이 슥슥 부드럽게 들어가는 것이 반갑지 않다. 찰떡 두 개랑 초코파이 두 개를 넣어주고, 따뜻한 물을 떠놨다. 마스크를 끼고 현관문을 여는 남편.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다정한 인사보다는 뜬금없는 독침 발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보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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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는 것도 귀찮다.
9시가 되어서야 거실로 슬금슬금 나와서 움직여본다. 갑자기 보고 싶은 ‘너의 이름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천재였다. 원래 타임슬립 장르를 좋아하는 나는 처음 봤을 때 보다 두 번째, 세 번째 점점 빠져들었다. 자주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할 정도로 섬세하고 특히 배경이 아름답다. 내가 주인공이 된 듯 혜성을 같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달까. 아, 좋다. 여운이 오래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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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보리차와 삶은 달걀 한 개.
선물 받은 똥기사 쾌변약을 먹었더니 배가 마구마구 아프다. 화장실을 네 번 다녀오고 나서 넉다운 상태. 힘이 없어서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좀 넘게 잤나. 전화에 깨고, 다시 영화를 틀었다. ‘더 레이디 인 더 밴’. 자칫 지루하게 풀어졌을 수도 있지만, 메리를 관찰하는 시점에서 잘 표현했던 것 같다. 이웃을, 사람을, 약자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보이기도 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나. 샛노란 밴을 보면 그녀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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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남편이 늦다.
그래서 저녁을 일찍 차렸다. 곤드레밥과 어묵탕을 데우고 혼자서 열심히 먹었다. 첫 끼라 더 맛있었는지, 금세 다 비우고 과자랑 맥심라떼까지 야무지게 먹는 나. 인풋 아웃풋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인풋이 과한 거 같다. 헤헤. 오늘도 엄마랑 통화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그러나 순기능으로 우리는 연락을 자주 하고 있다. 뉴스에서 마스크 5부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보를 알려주신다. 그리고 내일 택배를 부칠 건데 필요한 건 없냐며 물어보신다. 내리사랑, 엄마의 사랑은 늘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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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이 나무를 하는 동안 영화를 또 봤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궁금해서 튼 ‘레이디 맥베스’. 오메. 점입가경형 영화였다니.. 억압과 욕망에 관한 거라 충격적인데 몰입도가 장난 아니다. 다 보고 나서 곧 남편이 집에 왔다. 시부모님 댁에 가서 장어랑 달걀 한 판과 바나나를 받아왔다. 먹을 게 많아진 우리집. 엄마들 만세 만세. 오늘도 등장하는 죽. 물 마시듯 호로록 들이켜는 남편은 배가 무진장 고팠나 보다. 나무 작업에 운전까지 너무 지쳐있다. 내가 할 일은 고생했다며 토닥토닥, 궁뎅이 팡팡 쳐주는 것. 고생했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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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잠을 깬다는 경칩이 돌아왔다.
매년 경칩을 일기에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절기를 보면 계절의 변화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개구리도 깨고, 봄을 알리는 산수유와 매화도 곳곳에 폈다는데 왜 우리는 집을 지키고 있는 걸까. 경칩왔숭. 빨리 나가고 싶숭. 코로나 얼른 사라지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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