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에 멈춘 사람...
명상, 심리학, 재테크, 뇌과학, 자녀교육, 건강, 자기계발. 나는 계속 배웠다. 머릿속에 지식은 차곡차곡 쌓였고, 남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만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변화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선택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뭘 해도 나한테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안전했으니까.
오랫동안 나는 이걸 단순히 '자기비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조금 다른 걸 발견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믿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된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역기능적 도식'이라고 부른다. 과순응, 부정적 비교, 정서적 박탈. 내 안에는 이 세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나는 늘 평가 대상이었다.
어릴 때 내가 받은 피드백은 대부분 잘못하고 부족한 것에 대한 것들이었다.
"여기 틀렸네."
"이건 좀 부족한데?"
"하지 말라고 했지."
"배웠는데 왜 몰라?"
"그것도 못해?"
"왜이렇게 조심성이 없니"
"이기적인 애구나"
"살만 빼면 예쁠텐데"
칭찬보다 지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린 나는 이 피드백들을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였다.
나는 늘 평가받고 점검받아야 하는 존재로.
나의 판단은 믿을 수 없고 부족하다고 느껴왔다.
내 안에 '나는 충분하지 않고 부족한 사람이다'는 감각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심었다.
그리고 내 본모습 그대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생겼다.
나는 열등감, 슬픔, 외로움, 두려움 속에서 생존 전략을 만들었다.
칭찬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기분 좋아야 할 칭찬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가와 판단이 들어간 칭찬은 나를 긴장하게했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있었던 상황도 나에게 칭찬을 부담스러하게된 사건으로 크게 자리잡았다.
그 사건이 일어난 자리에선 '칭찬이 정말 불편했다.'
어렸을 적 가까이 사는 고모가 우리 집에 오시면 늘 자식 자랑을 했다.
"세상에 우리 딸이 그걸 그렇게 잘해."
"우리 아들이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나한테 뭘 해줬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엄마는 지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도 말했다.
"어머 그래요? 우리 애들도 그래요."
문제는, 그게 내가 실제로 한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일들이었다. 심지어 하지도 않은 일도 있었다.
그 순간 내 몸은 알았다. 이 칭찬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구나. 엄마가 고모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말이구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나는 부담을 느꼈다.
'아, 나도 고모 자식들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구나.'
칭찬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짐이 되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 잘한다고 느끼지도 않은 일에 대한 칭찬은, 결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대로 바뀌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칭찬이라는 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말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칭찬은 비교 속에서 나왔고, 방어기제 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과순응'을 학습했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분위기가 깨지지 않도록, 나는 그 칭찬을 받아들이는 척했다. 내 진짜 느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더욱 나는 부족한 사람이되었다.
동시에 '부정적 비교'도 내면화됐다. 고모 자식들과 나 사이에는 늘 비교가 있었고, 그 비교 속에서 나는 내 위치를 계속 확인해야 했다. 내 감각 자체를 의심하게 됐다.
'내가 잘했다고 느끼는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이 맞는 거겠지...'
무의식 안의 내면의 소리로 자리잡았다.
아는 것에 멈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지식만 모으는 사람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효율적인 학습법도 찾아보고, 시간 관리법도 알아보고, 집중력 유지 방법도 다 알게 되었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였다. 운동법도 알고, 식단도 알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다 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거나,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다.
'내가 이걸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해서 정말 효과가 있을까?'
그리고 결국 중도에 그만두거나 끝까지 하지 않았다. 공부도, 다이어트도. 해야 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끝까지 해본적도 있었다. 다이어트 18키로 감량으로 생애 최저 몸무게를 찍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한 다이어트 방법에 신뢰가 들지 않았다.그러자 바로 다이어트가 힘들어지고 싫어졌다. 성취감도 자존감도 금새 사라졌다. 결국 요요가와서 다이어트 전의 몸무게로 돌아갔었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다이어트 방법이 정석이었다. 현재는 다시 10키로를 감량했다)
아는 것은, 아는체 하는것은 심리적으로 안전했다.
지식은 틀릴 수 없다. 책에 쓰여 있고, 전문가가 말한 거니까. 누가 물어보면 아는체 하며 대답할 수 있었다. "응, 다이어트 방법 좋지. 나도 알아." 하고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행한건 아니었기에 금새 내 말에 힘이 없어졌다.
실천하는 것은 위험했다.
내가 직접 실천 하면, 내 선택이 된다. 내 판단이 개입한다.
그럼 내 선택이 틀릴 수 있다. 잘못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확인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역시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야.'
더 두려운 건, 만약 내가 정말 잘하게 된다면?
그럼 또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칭찬은 또 다른 비교를 만들고, 또 다른 기대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그러니까 차라리 '아는 것'에 머무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가끔 나는 용기를 냈다. '이번엔 정말 잘 해봐야지.'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공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멈췄다. 핑계는 많았다. 바빠서, 피곤해서, 시간이 없어서.
나에 대한 기대가 무서웠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웃기게도 어이없게도 내가 잘하게 되는 게 두려웠다.
왜냐하면, 내가 잘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기 시작한다. "너 그거 잘하잖아. 이것도 해봐."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또 평가받고 점검받는 존재가 된다.
이번엔 '잘하는 사람'으로서 점검받는다. 더 높은 기준으로. 더 자주...
그렇게 해석했다.
그 존재가 싫었다. 그상황이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잘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잘하지 않으면 기대도 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실망이 없으면 나는 안전하다.
이게 내가 나한테 걸어둔 저주였다.
'성장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성장하지 않는 게 안전하다는 학습'이었다.
겉과 속의 괴리감이 컸다.
지식은 계속 쌓였다. 책장에는 읽은 책들이 늘어났고, 유튜브 저장 목록에는 '나중에 볼 영상'이 수백 개였다. 노트에는 정리된 내용들이 가득했다.
겉으로는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저것 많이 알고, 대화할 때 할 말도 있고. "너 그것도 알아?"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밤마다 자책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게 많지? 아는 것도 많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네.'
누워서 하루를 돌아보면, 시도한 게 없다는 걸 자각했다. 오늘도 배우기만 했다. 변화하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자책을 하고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해?'
'그냥 하면 되는데 왜 못 해?'
'나는 진짜 안 되는 사람인가?'
자책이 쌓이면서 더 시도하기 어려워졌다.
새로운 걸 시도할 생각 자체가 무거워졌다.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깊이 안전지대로 들어갔다.
책을 더 읽고, 영상을 더 보고, 정리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직 부족해 더 알아야 해.'
'언젠가는 내가 하지 그것도 못하겠냐?'
'충분히 알면 그때 시작할 거야.'
자기 합리화였다.
하지만 그 '충분히'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충분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스스로 외로워지기를 자처했다...
나는 혼자는 아니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대화도 했고, 웃기도 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늘 외로웠다.
'정서적 박탈'이라는 도식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내가 불안하다고 말하면,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라는 위로를 들었다.
나도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내 불안을 이해한 게 아니라, 불안을 없애려는 시도였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다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힘듦을 공감한 게 아니라, 힘듦을 상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내 감정을 말해봤자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혼자 삼키는 게 낫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점점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갔다.
겉으로는 관계 속에 있지만, 속으로는 홀로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생각이 든 오늘,
나는 이 모든 걸 다르게 이름 붙였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내가' 아니다. 나는 제대로 된 관심과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실제로 한 일을 보고, 내 그대로를 인정받고, 거기에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내게 의미를 가진 일에 "잘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각자의 관점에 따른 지적을 받았다.
내 관점을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했다.
지적에 위축되어 있으니 자신감 있게 설명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래왔듯,
지적을 '살아남기위한 중요한 정보'로 수용했다. 갈등이 두려워 반박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감각을 믿는 법을 배울 수가 없었던 거다.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잘하면 더 높은 기준으로 점검받을까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외로웠던 사람이었다.
과순응, 부정적 비교, 정서적 박탈. 이 세 가지 도식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처음으로 나를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두렵다. 다시 뭔가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배운 걸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이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왜 나는 나한테 기대하지 않게 됐는지. 그리고 이 패턴들이 단순히 병리가 아니라, 재구조화할 수 있는 도식이라는 것을.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렇게 말한다. 도식은 바꿀 수 있다고. 명상으로, 인지 재구조화로, 새로운 관계 경험으로.
그리고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작게. 아주 천천히.
내가 진짜로 잘했다고 느낀 일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부터.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부터.
과순응 도식이 올라올 때, "이건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자동 반응"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부터.
부정적 비교가 시작될 때, "서열을 만드는 건 상황이지 나의 가치가 아니다"라고 되새기는 것부터.
정서적 박탈의 외로움이 찾아올 때, "누군가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고 믿어보는 것부터.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오늘은 믿어보려 한다.
ㅡ 나의 역기능적 도식 패턴 ㅡ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자신의 패턴을 확인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패턴들을 발견했다.
1. 과순응 도식
말하기 전에 상대의 감정을 예측한다
갈등 가능성이 보이면 조용히 물러난다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숨긴다
상대가 불편해할 것 같으면 말을 삼킨다
2. 부정적 비교 도식
누군가 자랑하면 즉시 불편해진다
칭찬은 가볍게 넘기고 비판은 오래 기억한다
서열 느낌 나는 대화를 싫어한다
내가 잘했다고 말하면 오만하게 보일까 걱정된다
3. 정서적 박탈 도식
깊은 이야기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하거나 거의 하질 않는다.
"누가 나를 완전히 이해할까?"라는 외로움이 있다. 진짜 이해받았다는 경험이 적다
이 패턴들이 너무 익숙하다면, 당신도 비슷한 도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도식은 관계 속에서 학습된 생존 전략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조금씩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