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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Dec 09. 2020

낮은 곳에 임한 운명의 이정표가 국가의 손에 쥐어질 때

안티고네(2019), 소피 데라스페, 109분_①

※영화 〈안티고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 후 감상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의 리뷰는 총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여기 창백한 벽을 등지고 한 사람이 카메라를 노려본다. 초췌한 얼굴에 짧게 깎은 머리, 그간의 정황을 짐작할 만한 외관임에도 눈빛만은 또렷이 정면을 응시한다. 심문하는 목소리가 울리고, 안티고네는 불안과 슬픔이 담긴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출처: 다음 영화

영화 〈안티고네〉는 이천여 년이 훨씬 지난 소포클레스의 비극 삼부작 중 하나인 〈안티고네〉를 각색했다.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규범과 명령에 저항하는 안티고네는 자연의 법이라는 불변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양심을 걸고 목숨을 바친다. 서로의 정의가 맞부딪치는 순간을 주목하며 개인과 국가, 공동체와 양심을 이야기하는 오래된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영화는 안티고네라는 개인이 시대의 아이콘 되어 세상을 향해 양심과 신념을 외치는 목소리 어떻게 메아리 만는지를 보여준다.



운명을 지휘하는 국가가 비-인간을 대하는 방식

에테오클레스는 국가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형제를 지키려다 경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는 공권력으로부터 반항한 개인의 ‘반역’이 더 중한 범죄인 사회에서 폴리네이케스의 저항은 정당한 방어와 항의가 아닌 성인이 된 상습 전과자의 추방 사유가 되었다. 그는 국가의 법을 어겼고, 추방의 형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시민권자가 아닌 그에게 국가는 보호와 자비를 베풀 의무는 없었다. 이민 첫 세대의 삶이 그러했듯 낯선 땅에 알 수 없는 언어의 이질감은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알제리 내전 상황에 어린 사 남매를 데리고 캐나다로 탈출한 할머니 메노이케우스의 기억에 언제나 공권력의 총부리는 시민을 향해 있었고, 제복만 보아도 무릎을 꿇고 경찰의 방문에는 몸을 숨기는 게 당연하던, 위태로운 희생자였다. 그런 안티고네 가족에게 타국 땅에 영주권이니 시민권이니 하는 것들은 존재하나 부재한 제도적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난민에게 더 가혹한 안전과 보호의 조건에 국가는 최소한의 거주만을 보장할 뿐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선택한 생존의 방법은 이슬람 계열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고대 희곡을 현대로 각색하며 풍부해진 설정 중의 하나는 죽음과 선택의 당위성이다. 희곡 속 두 형제는 서열의 정점인 왕실 가문의 위치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으로 비극이 시작된다. 세습이란 피할 수 없는 갈등의 정치적 이유는 현대에서 생존이라는 본질적 이유로 환원된다. 알제리의 박해를 피해 온 평범한 이민자 집단이었던 영화 속 안티고네 가족이 캐나다에 가지고 올 수 있던 것은 남겨진 가족과 생존의 의지였다.      


인물의 삶에 새로운 맥락을 집어넣으면서 안티고네의 행동뿐만 아니라 시초가 된 오빠의 죽음과 구속은 희곡의 종교적 의미와는 다른 운명론적 서사로 자리매김한다. 이주 이후의 삶에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국가 시스템의 외면은 새로운 운명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안티고네의 수사관은 두 오빠의 조직 연루 사실과 사회 혼란을 강조하며 이들에게 취하는 국가의 강제력 행사를 불가피한 상황으로 변호한다. 하지만 관객은 가난한 난민의 삶에서 생존의 수단으로 범죄조직에 몸을 담게 된 두 형제의 맥락을 짐작한다. 우리는 마약 밀수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고 엉망이 된 얼굴조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말하는  폴리네이케스의 선택을 단순한 악의 목적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폭력과 죽음의 운명으로 두 사람을 몰아간 주체가 이천 년 전 그리스에서는 절대자라는 필연적 운명이었다면, 현대 국가에서는 시스템이라는 절대 권력과 부작위로 말미암은 인위적 운명임을 말한다. 국가가 커질수록 내부의 인간성은 휘발하고 제도의 외피만 남는다. 거대한 국가가 절대자와 동일시된 사회에서 신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교도는 핍박받으며 불순분자라는 멍에를 두른다. 국가라는 테두리에서 제외된 비-인간의 삶과 맥락은 사라진 채 오직 규범과 권력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안티고네 가족이 설 자리는 없다.     


안티고네의 불완전한 해석을 말하다

희곡의 안티고네는 비극적 운명을 맞은 오이디푸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딸이다. 국가의 법을 어기고 죽은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지 말라는 크레온 왕의 법을 어기고 장례를 지내주다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본성과 의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마저도 피하지 않는 안티고네는 스스로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다. 단단하며 용기 있는 그의 대화를 영화에 그대로 옮기는 대신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현대의 안티고네에게 새로운 환경과 설정을 부여하여 명명한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렇지만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안티고네의 행동과 선택은 관객에게 의문을 갖게 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미래를 깡그리 앗아 갈 무모한 선택을 감행한 어린 소년의 치기 혹은 반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를 특정한 누군가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도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히려 안티고네를 해석하기 이전에, 그가 가진 수많은 불완전성을 나열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영화의 안티고네는 알제리 출신 이민자이며 사 남매 중 막내로 장학금을 받을 만큼 학업 생활도 원만하다. 폴리네이케스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미성년자인 본인이라면 죄가 경감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오빠의 모습을 재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간다. 안티고네 영화 초반 폴리네이케스의 껄렁한 태도를 못마땅했지만 그의 탈옥을 위해 기꺼이 그가 되기 위해 문신까지 감행하는 결심을 한다. 희곡의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법, 남성 중심의 언어와 사회에서 저항하기 위해 남성적 정체성을 획득한다. 극 중간 크레온 왕은 안티고네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남성성이 소멸하는 대신 안티고네가 남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두 아들 대신 안티고네가 진정한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안티고네의 남성성은 남성의 법을 이야기하는 상대편에 맞서 그들의 목소리를 빌려 동등한 위치에서 저항하는 순간 빛을 발한다, 영화는 안티고네를 실제 남성의 형상으로 국가의 통제 공간에 침투해 남성의 법을 거부하고 탈취하는 저항의 장면을 희곡 바깥에서 재현한다.        


하지만 안티고네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여성 영웅 정도로 해석한다면 그의 일부만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가족과 남성 연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여성 주인공의 희생을 그리는 서사를 여러 차례 읽은 바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안티고네의 선택과 저항은 가족 공동체 존립 이상의 의미이야망을 품은 지도자의 일대기로도 보인다. 단지 오빠를 지키기 위한 소녀 가장 정도로 그의 행위를 규정한다면 가족 전체가 공범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뛰어드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모든 책임을 홀로 지는 편이 더 타당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가족과 연인, 친구를 활용한다. 그의 행위는 젊은이의 무모함보다는, 불확실한 운명 속에서 끊임없이 위치를 재설정하며 자율성을 가진 인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고집스러운 혁명가와 닮았다. 영화 중반 안티고네의 머그샷으로 만든 붉은색 선전 포스터체 게바라의 유명한 이미지 떠올린다. 간결한 문구와 인상적인 퍼포먼스, 그리고 극적인 성장 배경은 사회운동가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하다. 감독은 안티고네가 가진 불복종과 혁명의 이미지를 확장하며 이를 시민 전체의 투쟁으로 넓힌다.      

하지만 이 해석마저도 온전한 설명 되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는 연대의 흐름은 안티고네의 말과 행동이라는 조각난 파편으로 추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그들을 자신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조력자로, 시위대는 그를 기수로 하여 각자의 목소리를 분출하는 출구로 각각 활용한다. 연대한 사람들은 안티고네의 의지에 힘을 얻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억압을 표출한다. 이는 공권력, 인종, 여성 등 다양한 영역이지만, 사실 안티고네의 출발은 추방당할 오빠에 대한 마음이었다. 사회 운동의 시작점에 구현한 정의의 이상은 행동하는 민중이라는 힘을 얻으면 역설적으로 그 방향과 성질은 바뀌기 마련이다. 결국 거대한 정의의 물결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지만, 여전히 그 또한 정의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크레온의 정의와 안티고네의 정의가 다르지만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여성 영웅으로도, 열정적인 혁명가로도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심지어 결말에서는 가족의 결합과 정착 역시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티고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목적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화 〈안티고네〉의 리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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