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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Dec 13. 2020

부조리를 겨누는 날카로운 박동이 메아리로 퍼지는 순간

안티고네(2019), 소피 데라스페, 109분_②

※영화 〈안티고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 후 감상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의 리뷰는 총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안티고네〉 1부:




출처: 다음 영화


안티고네의 주장: 운명마저 지나칠 용기

안티고네의 주장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기존의 질서와 구조를 비껴가는 그의 가치관 때문이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 속 연인 하이몬과 식사를 하는 시퀀스이다.


한 번 속였으니, 또 한 번 속일 수 있겠지.


이 대사는 안티고네라는 인물의 신념을 한 번에 요약한다. 눈을 가린 채 하이몬이 건네는 초밥을 먹는 과정에서 안티고네는 한 차례 거짓말에 속는다. 날생선을 주지 말라는 당부에도 하이몬은 장난 삼아 생선 초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삶에 번복은 없다. 날생선을 먹지 않겠다는 신념은 이미 깨졌지만, 다시 속을 수는 없다. 그는 다시는 눈을 감으라는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안티고네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어서 오히려 타협하거나 방향을 틀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운명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박동수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견고한 사랑과 신념이라는 장치로 작동되는 존재에게는 이미 목적지가 있고, 그래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절대 주장을 번복하지 않는다. 오직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한다. 소리 낸 언어는 돌이킬 수 없고, 발설한 이상 지켜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심장이 시키는 일이고,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황폐해지더라도 지켜야 할 사명인 실존이라는 가치에 타협은 없다.

출처: CULT MTL

그렇다면 우리는 안티고네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초반 가족과의 식사 장면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이 쓰던 리포트의 내용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아직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서야 가족을 향해, 그리고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이는 모든 이야기의 프롤로그이며, 안티고네가 자신의 의무를 정립할 준비를 마치고 발설하는 순간이다. 이후 안티고네가 겪는 모든 비극적 사건은 불확실한 주체가 완성되는 서사이며, 고통으로 피어나는 ‘가슴속 꽃이 담기는’ 안티고네의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안티고네는 가족에게 닥친 사건이 끝내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슬픔에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는다. 안티고네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어떤 이유도 부여받지 않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운명을 지휘하는 존재가 국가라면, 안티고네는 운명이 쥐여 준 삶을 거부한다. 그는 인간으로 온전히 주장할 절차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변호사의 조력이든, 복지제도든, 시민권이든, 후견인 제도든 관계없이 살해를 저지른 국가로부터 주어진 행복이라면 단호히 물리친다. 안티고네의 목표는 캐나다의 시민으로 행복을 찾으려는 에스메네의 삶이나, 지옥과도 같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메노이케우스의 삶도 아니다. 죽은 에테오클레스의 삶을 대신 사는 것도 아니다. 안티고네는 국가에 매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삶의 의미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관객에게 사유하게 한다.



안티고네의 진실: 휘발하는 말과 일깨우는 꿈          

폴리네이케스의 등장으로 영화는 변곡점을 맞는다. 안티고네는 뉴미디어를 통해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시민의 지지로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도망가지 않았고, 캐나다를 떠나지 않았다. 도로 잡힌 오빠 때문에 안티고네는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안티고네에게 국가는 보호와 안전을 담보하는 곳이 아니다. 그게 알제리든 캐나다든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맞을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에스메네는 캐나다의 시민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착과 행복이라는 대가는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편안한 가상세계 매트릭스에서 진짜 같은 행복을 느끼며 살지, 기계에 종속된 비참한 삶을 목도하는 투쟁의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마찬가지로 안티고네는 가족과 정착을 위해 국가의 울타리에서 존재할지, 내 신념과 양심을 향해 가시밭길을 걸을지를 선택한다. 급변한 상황에 잠시 망설이던 안티고네는 테이레시아스를 대면하는 꿈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바로잡는다. 안티고네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빨간 약을 먹기로 선택한 것이다.

   

헛된 희생이 아닐까 의심이 들면 한 소년을 떠올려요. 어린 폴리네이케스.
부모님이 없어서 손을 잡아줄 수 없는.


안티고네는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예언자이자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인 테이레시아스를 대면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스스로의 의지와의 충돌에 고통받는다. 이는 언어의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말은 한번 뱉으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결국 휘발되어 날아가는 것이 말이다. 발설은 태생적으로 불안정하다. 따라서 안티고네가 말하는 저 대사는 진정한 심장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위태로운 언어로부터 파생된 포스터의 이미지와 글은 진실을 오인하고 왜곡한다. 따라서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내 심장이 시킨다’는 구호는 거짓이 되며, 또다시 법을 어길 것이라는 말 역시 믿을 수 없다. 선전으로 얻은 집행유예 역시 국가가 준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국가의 법을 지키는 과정일 뿐이다. 내 심장이 시키는 것은 자유로운 나 자신이지, 폴리네이케스를 살려 가족을 지키고 캐나다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만난 테이레시아스는 눈이 가려진 안티고네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존재하는 내가 아닌 바깥의 세상이다. 눈 앞에는 죽은 에테오클레스, 감옥에 갇힌 폴리네이케스, 보호소 밖에서 노래를 부르는 메노이케우스, 사랑하는 하이몬이 있다. 타자의 존재는 눈에 밟힌다. 하지만 눈이 멀었기에 오히려 핵심이자 본질인 안티고네 자신을 말하는 테이레시아스는 마치 거울 앞의 안티고네처럼 예언 같은 의지를 일깨운다.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산 채로 갇힐 것이라는 단언은 산 채로 갇히더라도 나를 지키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렇게 안티고네는 영웅이 아닌 개인이 된다. 안티고네는 불완전한 입으로 행하는 발화라는 거짓을 그만두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선택한다.




안티고네의 승리: 부조리와 연대를 비집고 나를 말하다

하지만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안티고네를 단지 개인으로 둔 채 알제리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개인의 삶에 주어진 비극 뒤에 공동체가 함께 한다는 옳음의 용기를 말한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연좌제라는 저주다. 오늘날 그 저주는 가족을 넘어 소외와 차별에 신음하는 이들을 향한 연좌제다. 영화는 희곡의 코러스로 상징되는 사람들의 반응을 소셜미디어의 피드와 댓글을 편집한 영상 클립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실체 없이 말한다. 존재하나 부재한 법에 사회는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인간의 연대로 저항한다.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가 춤과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하듯, 전파를 타고 흐르는 21세기의 코러스는 스마트폰과 SNS로 적극적인 의견을 표출하고, 법정 안 벨소리의 연대는 저항의 목소리를 울린다. 법의 이름으로 무시해 온 인간 본질의 파괴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영화 속 세 번 나오는 영상은 각각 추모, 혐오, 저항과 연대를 상징한다. 새로운 세대는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모르는 이에게 상처를 낸다. 사람이 죽고, 동생이 대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추모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던 SNS의 글들은 험오와 비난의 글로 넘쳐난다.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가장 현대적인 무기인 스마트폰은 소수자를 향한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된다. 하지만 감독은 정의의 연대로 무장한다면 사회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사회가 반드시 선하다고 믿지 않는다. 차별과 혐오의 시대에도 자라나는 연대는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그 안의 개인은 어떻게 되는가. 평범하게 살고 싶던 개인은 어느새 투사가 되고, 영웅이 된다. 누군가는 원치 않은 비극을 맞아 원치 않은 위치에 서서 전장의 선봉에 선다. 우리는 그들을 추앙하지만 진정으로 원했던 것인가는 묻지 않아 왔다. 안티고네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그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희롱하고, 특정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는 영상에 안티고네는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안티고네를 규정하는 어떤 시도도 번번이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것이 연인이나 가족, 심지어 영화의 감독마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안티고네와 국가의 대결에서, 안티고네를 연대의 화신으로 규정하려 했던 감독과의 대결이 된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현장에서 카메라 촬영까지 직접 담당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시선은 곧 감독의 시선이며, 감독의 눈에 비친 안티고네를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 안티고네와 하이몬은 다시 철책을 넘어 들어간 잔디밭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곳은 안티고네와 하이몬이 두 번째로 철책을 넘은 잔디밭이다. 영화 초반 철책을 넘어가며 안티고네는 이것이 자유라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알아낸 사실은 국가라는 세계에 얽매인 이상 신념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자유, 행복했던 기억이 남았던 장소에서 자유 비슷한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끼는 빗속의 순간, 카메라는 그들과 떨어진 곳에서 몰래 몸을 숨겨 바라보고 있다. 이는 감독의 의도가 보기 좋게 무너지는 순간이자, 명백히 안티고네의 승리를 선언하는 장면이다. 국가의 테두리에서 사회의 연대를 바랐던 감독의 예상을 빗나가는 안티고네의 행동을 몰래 지켜본 카메라는 떳떳하게 그를 쳐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안티고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온전히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인가. 안티고네는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완전하더라도,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도 균열을 내 보라고 과감하게 이야기한다.      





공항의 가족들은 다시 살아있는 지옥으로 떠난다. 하지만 안티고네만큼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했다는 점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제2의, 제3의 안티고네는 캐나다에서 시민으로 행복을 찾고 싶어 돌아올 것이다. 연대의 벨소리는 여전히 울릴 것이고, 안티고네의 마지막 얼굴은 기대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보인다. 부조리를 겨누는 박동이 메아리가 되는 순간, 당신을 위해 울리는 전화 과연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같은 전철을 밟으려는 이들에게 안티고네의 시선은 고민을 던진다.




※글을 쓰며 이 책을 참고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동문선, 2005, 조현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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