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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Dec 19. 2020

불완전한 대동세상의 베타 테스트는 현재 진행형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박윤진, 86분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와 게임의 인연이란 언제나 얇고 가늘어서, 충분히 무르익지도 못한 채 서서히 끊어지기 일쑤였다. 익숙지 않아 마음을 둘 대상이 없었거나, 눈이 너무 높았던 이유 등으로 게임과의 조우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세대에 같은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라면 어릴 적 게임에 대한 희미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통기타와 다방, 롤러장과 디스코인 사람이 있듯,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RPG 게임과 CRT 모니터가 달린 데스크톱 컴퓨터이다. 모두가 자신 안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뿐인 세계를 만들어가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일 년을 수 십 년의 세월처럼 살아가는 아이에게 컴퓨터 앞에 몰입했던 시간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그 기억을 붙잡고 어떤 이들은 오늘도 잊히지 않는 고향, ‘망겜’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십육 년을 일랜시아 이용자로 살아온 감독이 오프라인에서 길드원을 만나며 애증의 게임 일랜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1999년 발매한 일랜시아는 높은 자유도와 세밀한 디테일, 매력적인 세계관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도트에서 3D로 변화하는 게임 생태계에서 ‘구시대의 마지막 자식’이었던 게임은 수익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랜시아는 회사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비운의 게임이 된다. 관리자는 한참 전에 사라진 게임 속 사용자들은 매크로로 손쉽게 캐릭터를 키우고 최상의 루트로 캐릭터를 키울 수 있는 공략집을 공유했다. 버그로 둘러싸인 낡고 황폐한 게임의 이용자들은 점점 ‘고인 물’이 되어갔다. 게임만 사라지지 말기를 기원하며 몇 안 되는 이용자 스스로 위태로운 명맥을 이어가던 중 일랜시아에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버그가 등장한다. 서비스가 종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서버 전체에 퍼진다. 이에 감독인 ‘내언니전지현’과 그가 속한 길드 ‘마님은돌쇠만쌀줘’의 구성원들은 이십 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게임을 구하기 위해 직접 넥슨 본사에 찾아가기로 한다.

출처: 다음 영화


첫 번째 도약: 일상으로 확장하는 게임문학

영화는 일랜시아의 초기 세계관과 게임 유저가 만든 세계관이 연결되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는 게임문학이 가진 빛나는 지점이다. 텍스트는 수용자의 재창조로 완성된다고 말하지만, 게임만큼 수용자와의 피드백과 소통이 활발한 장르도 없다. 메테오의 충돌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지구에서 고대인들은 마지막 희망으로 영력을 모아 일랜시아를 건설한다. 그 안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언젠가 예전의 지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생존자들은 바깥의 사악한 적과 맞서기 위해 힘을 기르며 일랜시아 안에서 공동체를 건설한다. 여기까지가 게임의 창작자가 구축한 서사다. 보통의 게임이 회사의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추가되는 퀘스트로 서사를 이끌어가지만, 골격만 두고 방치된 게임 이후의 이야기를 만드는 역할은 유저의 몫이 되었다.


영화에서 관리자가 사라진 버그 투성이의 게임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마치 무정부 상태의 미래를 다룬 SF로 보인다. 이때 유저들의 플레이로 게임의 서사가 도약하는 첫 번째 순간이 찾아온다. 제약의 요소가 적은 데다 관리마저 소홀한 이 RPG 게임은 접속자들에게 주어진 경로대로 캐릭터를 육성하는 공간에서 새로운 소규모 공동체이자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협업을 통해 경험치나 레벨을 올리는 용도인 길드에서는 마음껏 ‘친목질’을 할 수 있었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이곳은 아이템을 걸고 도박을 하거나 낚시한 물고기로 요리를 하고, 하루 종일 상대방 머리만 잘라 줄 수도 있는 공간이다. 게임의 창시자조차 잊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게임은 산업에서 문학을 거쳐 삶의 일부가 된다.



방황하는 세대에게 찾아온 일랜시아라는 고향  

기꺼이 삶을 떼어줄 애정을 주었지만, 무정부 상태의 공간에 대표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용자들은 변화 대신 현상 유지를 바랐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과거의 추억과 노력의 산물이 남은 곳에 회귀하는 까닭은 현실보다 더 자유로운 이 공간에서 과거의 향수와 위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민이랄 것도 없던 어릴 적을 그리워한다. 일랜시아를 하기 위해 방과 후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캐릭터를 키우기만 해도 벅찼던 시절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어른이 된 그들은 다시 일랜시아에 로그인한다. 우리는 고향이라는 판타지적 공간을 창조해 절망의 삶에 위안을 얻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윤색하고 왜곡시켜 만들어낸 자신만의 이상적인 고향의 모습을 그린다.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 마음을 다하고, 존재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리워할 수 있다.


어쩌면 일랜시아는 우리의 고향으로 너무도 적합한 곳일지도 모른다. 세계관에 따르면 일랜시아는 이상적인 종착지가 아닌 종말의 위기에 마지막으로 만든 임시보호소다. 즉 태생부터 정착지가 아닌 경유지로 탄생한 공간이기에 악의 무리가 사라진 세상이 찾아온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거악이 사라진 게임은 곧 게임의 종료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랜시아 밖의 세계는 절대 좋아져서는 안 된다. 삶이 팍팍해지면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인과관계가 전도된 게임 세계에서 유저들은 과거의 고향을 간직하기 위해 변화를 부정한다. 아무리 매크로와 버그로 뒤덮이고, 아이템 사기와 친목 행위가 도를 넘더라도 말이다.



무기력한 이상향의 자극에 주목하다

일랜시아의 자유로운 환경은 절망이 일상인 세대에게 새로운 자극을 준다. 유저들은 레벨을 올리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게임 시작 전 결정한 직업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직업대로 플레이할 유인성도 없다. 십 대 후반에 종용받은 결정의 순간이나 시험 성적표 하나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세계와는 다르다. 일랜시아에는 주변인의 재촉이나 눈치, 위계 관계, 생득적 특성에 의한 차별도 없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어떠한가. 감독이 만난 길드원들은 이십 대 중반부터 삼십 대 초반의, 학업과 취직으로 고민하는 사회초년생이다. 신자유주의를 체화한 이들은 좋은 삶은 결정되어 있다는 무기력이 기본값인 세대이다. 노력 무용론과 공정 담론, 수익성 극대와 무한경쟁이 자연스러운 이들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는 세계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몸에 밴 습성은 새로운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완벽한 형태의 ‘순수 직업’을 달성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었고, 유저에게 돈을 받고 캐릭터를 대신 키워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매크로 프로그램이 없는 유저들은 불공정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비판에 담긴 핵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평판과 경쟁의 규제에서 벗어난 세계에도 불평등은 존재하나, ‘성공’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반드시 성공하지 않아도 되고, 노력한 만큼 성과가 수치화되는 세상은 현실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우리의 뇌는 작은 성공에 자극으로 보상한다. 수차례의 좌절 뒤 만나는 디지털화된 결괏값을 보며 유저는 찰나의 기쁨을 맛본다.      


같은 길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이 새롭고도 낯선 생각은 현재의 게임 환경과는 다르다. 고과금 유저 중심의 수익 창출 구조로 불평등을 양산하는 게임 산업은 철저히 자본과 경쟁으로 움직인다. 게이머에게 결정론적 패배주의는 일상이며 희망보다 무기력이 감도는 게임에는 자극과 순위만이 남았다. 2030 세대는 이 두 세계를 모두 공유한다. 공정함에 집착하고,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묵인하는 세계. 매크로의 차별에 화를 내지만 모두에게 기본값이라면 기꺼이 외면하는 곳. 세상은 망가지지만 내가 덜 불편한 지금을 유지하고 싶은 무력함이 바로 이 세대를 대표한다. 일랜시아는 희망은 보이지 않고 암울한 미래가 예상되는 오프라인을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덜 불행한 이상향이다.  

   


두 번째 도약: 행동으로 이끄는 승리의 서사

잠깐 들르는 피난처에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없다. 불안 세대의 단면을 보여주던 영화는 단편 공개 이후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추가하며 조금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단지 악성 버그를 없애 주고 게임은 유지해 달라는 소박한 요청에 총대를 멘 감독은 본사에 찾아가지만 마땅한 성과는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여러 영화제와 미디어에서 주목받자 넥슨은 요청에 응답하고, 담당자와의 만남과 유저 간담회까지 성사되고 만다. 거기에 십여 년 만의 대규모 업데이트까지 이뤄냈으니, 영화의 파급력이 서브컬처 사회에 의미 있는 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감독은 일랜시아에서 게이머들이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듯 자신의 단편으로 외면받은 게임을 다시금 되살리는 경험을 한다. 여기서 게임과 영화로 이어지는 서사의 두 번째 도약이 발생한다. 게이머의 권리와 목소리는 수면 아래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단지 행동의 기폭제가 필요했을 뿐이다. ‘내언니전지현’이 촉발한 작은 변화는 카페 커뮤니티에서 몇 마디 글을 올린다고 달라질 게 있겠냐는 비관을 딛고 철옹성 같던 넥슨을 움직였다. 미디어가 세상을 바꾸는 경험을 우리는 여러 번 지켜봐 왔다. 하지만 마이너로 취급받던 게임 문화가 주류 사회에 던지는 도전과 행동, 그리고 작은 승리의 순간은 쉽게 얻기 어려웠던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어떤 세대의 두뇌에 깊은 자극을 주었다. 나에게는 소중한,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무언가를 지키는 방법을 깨달은 이들에게 지금의 기억은 행동하고 변화하는 삶의 베타 버전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으로부터의 탈출은 이제 첫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 일랜시아로 깨달은 삶의 베타 테스트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러 차례 이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언제나 극장에서 울고 있는 관객을 만난다. 도트 그래픽의 마을 장면에 집중하고 감독의 매크로 솜씨에 폭소하던 그들이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이유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삶에 일랜시아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각자의 조각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이나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다만 남겨진 기억은 우리를 좋았던 때로 데려가고, 영화는 그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따름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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