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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Dec 24. 2020

관습만 남은 점입가경 잔치에 누구를 위하여 향을 피우나

잔칫날(2020), 김록경, 108분

※영화 〈잔칫날〉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빠가 돌아가셨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오빠만 남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사람들은 매섭게 우리 둘을 몰아붙인다. 슬픔이나 원망, 그 외 잡다하게 몰아치는 감정에 관한 대답을 미처 꺼낼 새도 없이. 수의와 음식, 꽃장식과 영정사진, 돈, 서류, 청구서, 청구서. 사람들은 찾아오고 내게 이런저런 말들을 내민다. 고모는 내 이름이 어디 도망갈까 싶은지 시시때때로 부른다. 경미야, 얘 경미야. 하지만 나를 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비껴가는 맥락과 시선. 조문객이 지나갈수록 내 몸은 점점 투명해진다. 자리를 지키지만, 어디에도 없는 사람.


열 한시에 입관이라는데, 오빠는 집에 다녀온다며 나간 뒤 전화만 겨우 받을 뿐 여태 소식이 없다.

나와 김경만, 이제 이 세상엔 둘만 남아야 하는데, 아빠의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없다.



영화 〈잔칫날〉은 아버지의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입관 당일 지방의 팔순 잔치 사회를 보러 가야 하는 무명 행사 MC 경만과 그를 기다리며 장례식장을 지키는 동생 경미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장기 입원 중인 환자에, 어머니는 안 계신 가정의 생계 부양책임은 남매에게 돌아간다. 디자인 전공인 휴학생 경미는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충당하고, 집안의 가장이 된 경만은 각지의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프리랜서 사회자로 일한다. 어느 날 경만은 지방 행사를 마치고 경미로부터 전화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받는다. 사망과 함께 찾아오는 장례절차는 복잡하고 낯설다. 부르는 물품마다 지출인 장례식 준비에 당장 내일 있을 입관식과 장례 비용 마련까지. 경만은 정신이 없다. 그때 한 줄기 빛처럼 넉넉한 보수의 행사 대타 제안이 들어온다. 평소 같다면 절호의 기회였겠으나 문제는 그날이 하필 아버지의 입관일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경만은 돈이 필요했고, 동생에게는 비밀로 한 채 뒷일을 맡기고 경남 사천으로 향한다. 작은 시골 마을의 팔순 잔치에서 경만은 잃었던 어머니의 흥을 돋워 달라는 주최자인 아들의 부탁에 열심히 분위기를 띄워보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오히려 뜻밖의 사건에 연루되어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태가 되고, 장례식장에서는 경만을 찾는 독촉 전화가 이어진다. 과연 그는 이 이상한 잔칫날을 마무리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갈 수 있을까?     

출처: 다음 영화



남매 MC를 향해 과거로부터 온 두 개의 잔치 

가족의 죽음을 마주친 와중에도 직업이라는 현실 때문에 웃어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소재만으로도 역설적인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현실과 괴리된 관혼상제의 절차에 준비 동작도 없이 따라야 하는 사람이다. 옛 전통에 익숙지 않은 현대인들은 유교 의례를 준비하며 공간 전체가 몇백 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그중에서도 상례를 치르는 사람의 입장은 더욱 당황스럽다. 살아생전 장례절차를 준비할 수 없는 금기, 언제 어느 때라고 예측할 수 없는 사건에 촉박한 준비 기간, 대규모 모임의 호스트가 되어야 하는 책임, 게다가 과거에만 머무르는 장례식의 절차와 관행은 유족의 당연한 첫 감정인 슬픔마저 뒷전으로 밀어낸다. 그 대신 유교적 가치 준수와 으레 지켜야 할도리를 요구한다.


과거 친족 공동체 중심의 가족주의 생활양식이 지배적인 농촌 마을 문화에서는 애경사를 막론하고 의례를 마을 축제처럼 여겼다. 다 같이 어려운 형편에 평소 먹기 어려운 음식을 차리고 함께 친목을 도모하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큼 고단한 농사일에 단비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갓집을 처음 겪은 사람에게 그 장소는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북적이는, 평범한 잔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족의 범위는 축소되었고 사회의 단위 기준은 개인이다. 죽음의 순간은 몇 마디 말과 서류로 정리되며 처리 절차는 간소화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텅 빈 장례식장에 자신마저도 낯선 과거의 공간을 구현한다. 데면데면한 친지와 이름도 가물가물한 손님을 맞이하며 슬픔도 반가움도 아닌 인위적인 감정을 만들어야 하는 공간. 그래서 장례식의 상주는 마치 삼 일간의 논스톱 행사를 콘셉트에 맞게 진행해야 하는 사회자의 위치가 된다. 서로 다른 공간의 두 개의 잔칫날에 남매는 각자 MC가 되어 주어진 자리를 수습할 사명이 주어진다. 경력과 무관하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행사를 진행하는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버벅거린다.



관습의 외피만 남은 이상한 나라의 투명인간, 경미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과거의 관습과 자본계급 사회가 충돌하는 이상한 나라로 날아온 남매의 이야기다. 이때 장례식과 생일잔치는 두 세계의 단점만 추출된 뒤틀린 공간으로 묘사한다. 품앗이와 공동체주의가 사라져 텅 빈 상갓집을 채워야 하니 남은 것은 관행과 절차라는 외피와, 돈과 연줄로 이루어진 과시와 욕망뿐이다. 가부장 가족주의의 하드웨어와 비정한 자본의 논리라는 소프트웨어로 작동되는 장례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약자인 경만과 경미는 상영 시간 내내 고통받는 인물이다.      


여기서 영화는 주로 경만의 시점에서 잔칫날에 겪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장례식장에 홀로 남은 경미가 겪는 고군분투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다. 경미의 고난은 상주인 오빠가 자신을 두고 간 사이 혼자서 장례식을 관리해야 하는 ‘부적절한’ 책임에서 시작다.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전통적 유교 의례는 여성을 완벽히 배제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여전히 여성 배우자나 외동딸은 상주가 될 수 없고 장례의 주요 업무는 남성을 위주로 작동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초반 경만은 오빠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로 향후 모든 책임과 결정 권한을 본인에게 전가한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나이나 사회 경험 외에도 이미 남성에게 일원화된 장례절차에서 과대 대표된 장자의 성 역할과 주변화된 여성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특히 영화 속 장례를 주도하는 인물이 둘밖에 없는 상황에서 편중된 역할 분담은 극대화된다. 영화의 서사나 시선이 자연스레 경만으로 맞춰지는 이유는 이미 굳어진 관습에 따라 경미는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게는 편육 주문부터 크게는 입관 결정까지 모든 장례절차를 담당하는 역할은 장자인 경만의 몫이다. 만약 역할이 동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인맥으로 움직이는 사회의 단면은 제외하더라도 열 한시라는 카운트다운으로 형성되는 서스펜스의 추동력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철저히 경만의 갈등을 만들기 위해 기존 구조에 편승하여 무자비한 현실을 재현한다.


초점을 달리하면 〈잔칫날〉은 장례식이라는 거대한 관습이 외면하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경미는 처음으로 장례라는 잔치의 MC를 맡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권한이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경미를 상주의 행방을 묻거나 잔심부름을 시킬 때만 부른다. 그리고 미숙한 관리 전반의 책임을 ‘개놈의 새끼’라는 말과 함께 모두 경만에게 돌린다. 홀로 장례의 대소사를 관장해야 하는 경미의 이름은 여기저기 불리나 정작 그의 주장이 관철되는 순간은 전무하다. 이는 영화 전반의 흐름에 일관된 태도로 나타난다. 사망 직후 학원비를 빼서 돈을 충당하려는 제안부터 반찬 구성, 유족으로서의 태도, 입관 일정까지 경미의 선택은 번번이 제외된다. 경미는 항상 머뭇거리거나 한발 늦게 등장하며 장례식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미묘한 소외를 경험한다.      



경미가 결국 향불을 꺼뜨리고 말았더라면

변두리의 위치에서 상주가 될 수 없는 경미는 성차별적 관습으로 배제된 여성의 시선으로 기이한 공간을 바라본다. 상갓집에서는 너무 슬프게 울지도, 그렇다고 곡소리가 끊이지도 않아야 하는 이상한 곳이다. 꽃장식이나 수의의 가격에 머뭇거리면 불효의 자체 검열이 들어오고, 손님이 편육을 요청하면 당연히 있어야 하며, 줄 세운 화환의 개수가 고인과 가족의 평판을 증명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꼼짝없이 사흘간 갇혀 있어야 하는 경미는 구원을 기다리며 성에 감금된 여성이라는 영웅 서사의 대상으로 남는다. 그는 영화 시간 대부분을 사건의 경위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오빠만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경미가 창밖을 바라보는 쇼트들은 부조리한 공간의 탈출 욕구보다는 오지 않는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리움으로 보인다. 무지의 상태에서 반응으로만 존재하는 경미는 영화에서 주로 수동적으로 시키는 일을 수행하거나, 지쳐 누워있거나, 퉁퉁 부은 눈으로 울먹인다. 이는 영화가 여성 인물에게 설정한 대상적 이미지이자 현실의 장례절차 속 여성의 위치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무기력이다.     


그렇다고 〈잔칫날〉이 경미에게 관습의 전복과 혁명을 주창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급진적인 구성 없이도 풍부한 인물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반응만 남는 여성 인물의 서사는 영화에도 무의미한 소모일 뿐이다. 물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례식의 관행이 너무도 기괴한 탓에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모순된 사회 속에서 고통받는 장면의 배치는 인상 깊다. 그렇다고 사건의 나열로만 관객에게 평면적 인물의 이입을 바라기는 어렵다. 영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인 경미가 향을 뒤집어 끄는 씬에서 약간의 가능성을 기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향미에게 말하는 고모들의 핀잔과 장례식장 직원의 조언에는 모두 상 중에 향불을 꺼뜨리면 안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향불이 담당하는 이승과 저승의 매개체 역할은 결국 장례의 처음이자 끝이며 전통으로 이어받은 관습을 상징한다. 이것을 꺼뜨리는 행위는 여러 갈래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아버지라는 존재와 희생이라는 가치로부터의 단절, 관습으로부터의 탈주, 장례의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은 인식의 변화 계기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경미는 경만이 돌아오자 다시 향에 불을 붙인다. 앞선 해석은 사라지고 장자 영웅의 귀환과 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애끓는 가족애적 신파가 향을 타고 피어오른다. 향불의 상징성이 경미를 통해 전통과 관습으로 뭉친 남성 연대를 잇는 대상인 여성으로 옮아가는 순간이다.           





만약 경미가 향불을 꺼뜨렸더라면, 그래서 잔칫날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경미가 아버지의 죽음을 넘어 성장할 수 있었더라면 마지막 해맑은 웃음에 의미를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잔칫날〉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경만의 영화다. 그리고 잔칫날은 그 모습을 간직한 채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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