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8살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 왜! 나도 좀 놀아야 할 거 아니야!!"
저녁을 먹고 돌아와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이는 들떠 있었다. 집으로 가 어떤 놀이를 하며 놀지 신나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아이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낮에 미뤄둔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것. 아이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지 그럼 숙제를 다 하고 놀겠다며 아랑곳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숙제 끝나고 나면 잠잘 시간이라며 또다시 일정을 내놓는 게 아닌가. 그 제서야 아이는 현실을 자각했는지 외쳤다. 그럼 자신은 언제 노느냐고 자신도 좀 놀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 모습이 엄마와 아이의 귀여운 기싸움 같아 재밌게 지켜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저걸 벌써 알다니, 나보다 낫네.'
스포츠 선수를 좋아하고 응원한다거나 스포츠 보는 일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노력과 집념 때문이고 울고 웃기는 결과가 주는 울림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들의 이야기에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기도 하고 채찍질하기도 했으며 또는 같은 마음이 되어 그들의 성취에 내 삶에도 희망을 걸거나 그들의 실패에 아파하고 응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스포츠는 나에게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줬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을 동경하면서도 내 일상은 그들의 노력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했을 거라는 거다. 그게 스스로를 팍팍하게 만들기도 했다.
학생 시절 주로 TV 시청이나 인터넷 서칭 같은 일로 시간을 철철 쓸 때는 좀 쉬어야겠다거나 좀 놀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단지 유혹과 자극에 손쉽게 무너진 나약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그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당당하지는 못했다. 할 일을 좀 미뤘을 뿐 그렇다고 학교나 학원 숙제를 놓치는 것도 땡땡이를 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대충이라도 해 내는 거에 급급하기는 했다. 그 결과 운동선수처럼 열심히 살고 싶은 부푼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아 스스로를 작게 여기기도 했다. 팍팍한 마음이었다.
학생 시절 일찍 깨우치지 못한 건 노는 것과 하는 것에 밸런스였던 거 같다. 놀아 나쁜 것도 아니고 무조건 혹독하게 열심히 한다고 맞는 것도 잘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마음이 좀 더 윤택했을까? 삶에서 열심히 해야 할 가치와 휴식 혹은 놀이에 대한 가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치를 이해한 만큼 그 시간들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용했다면 마음이 덜 팍팍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운동선수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노력이 세상에 부각될 때마다 나는 열심히 몰아쳐야 하는 게 맞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만큼의 영웅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불만족, 그게 매 순간 또다시 나를 몰아치고 있었다. 마음이 훨씬 더 앞서는 날들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열정 많고 열심히 한다는 이미지를 어느 곳에서는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 한 편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스포츠 선수와 비교했을 때 그랬고, 자극적인 유혹에 손쉽게 무너져 나약하게 tv와 인터넷을 바라볼 때가 그랬다. 그러니 어떤 이미지를 가졌든 그와는 무관하게 할 때와 놀 때 그 어느 순간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거다. 무엇보다 휴식과 놀이 가치에 대해 하찮게 여겼던 나날이었다.
사실 휴식과 놀이의 가치를 빨리 깨우치지 못한 건 턱끝까지 숨차도록 열심히 살아보지 않아서 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힘들어 지쳐도 보고 푹 쉬어도 보았을 때 피부로 절실히 체감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청나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다는 스스로의 냉정한 평가도 어느 정도는 정확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힘들거나 지쳐보지는 않았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나도 모르게 삶의 밸런스가 잘 지켜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포츠 선수만큼 열심히 살아보려고 마음에 의지를 불어넣은 날들이 지금에 와서 더 열심히 할걸과 같은 후회나 아쉬움으로 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의지를 불어넣은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비록 유혹 앞에 나약하게 무너진 시간이 있었더라도 말이다.
현명하지는 못했으나 - 어쩌면 다행히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휴식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노는 건 나태나 시간낭비가 아닌 휴식의 일종으로 생각되어야 하고 너무 지치기 전에 당당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 그래야 이 길고 긴 장기레이스를 무사히 전략적으로 잘 완주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에게 주어진 인생은 모양이 다 다르고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주어진 인생이 장기레이스인지 단기레이스 인지를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수명이 짧은 스포츠 선수의 선수로서의 인생은 단기레이스이다. 그러니 그들은 주어진 그 시간을 위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써서 한 가지에만 몰입을 한다. 대신보다 이른 은퇴를 하고 나면 다시 주어진 장기레이스 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때는 적당히 힘을 풀고 여러 곳에 에너지를 분산해 사용하며 주변과 발맞추어 레이스를 달린다. 그리고 많은 부분 단기레이스를 달리면서 얻은 것들의 도움을 받으며 보다 선명하거나 여유 있는 코스를 읽으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이 삶이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인 거다.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모양의 인생이 주어지진 않았기에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도록 요구되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장기레이스만이 주어지기도 하는 거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가야 하는 삶, 그 삶을 단기 레이스처럼 달릴 순 없다. 코스가 읽히지 않는 길을 끝없이 달리기 위해서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는 안 된다. 대신 길 주변에 놓인 하늘과 바람과 식물 그리고 사람 그 모든 걸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야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생을 부여받은 사람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이 아닌 순환하는 호흡을 느껴야 마땅하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 성공에 이르러야 하는 삶이 있다면 천천히 주변과 스스로를 살피며 잔잔히 열심히 가야 하는 그런 삶도 있는 거다. 추측건대 나는 쉬어 쉬어 잔잔하지만 꾸준히 길게 가야 하는 인생을 부여받았다. 너무 지치기 전에 스스로에게 휴식을 당당히 부여하는 건 적어도 내 삶에서는 '내' 삶을 잘 살아 내는 중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