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 덕후
직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왜 이걸 해야 하는가. 어릴 땐 그냥 '하고 싶어서'였고 현재에 와서는 그 마음이 끝나지 않아서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그냥 '나의' 욕망일 뿐이지 않느냐는 생각이 다 달았을 때 오랫동안 단단히 세워져 있던 중심이 흔들렸다. 그 이상의 가치가 무엇이냐, 내가 하는 이 예술행위가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렇다면 그 의미와 내 행위가 부합하고 있느냐. 나의 욕망을 벗어나니 어떤 것도 답할 수 없었다. 어리고 순수했던 그 마음 하나를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이제와 평생을 공들여 애쓰고 있는 이 직업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겠으니 당당히 머물지도 그렇다고 쿨하게 버리지도 못한 채 방황 아닌 방황을 했다.
끝끝내 이해해 낸 직업의 의미가 혹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그만두어야 할 위기에 처한 그때, 낮엔 습관처럼 일상을 멀쩡히 살다가도 잠들기 전 밤만 되면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워 매일밤 똑같은 의문에 빠졌다. 그놈의 왜, 왜, 왜! 어떤 밤엔 직업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유의 전부일 수 있다 가볍게 털고 잠에 들었고 또 어떤 날 밤엔 의문을 다 해결하지 못한 채 깜빡 잠에 들어 내일이 되어버리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날 밤에도 잠들 때까지 핸드폰은 꺼지지 않았고, 그 작은 화면 속에 빛으로 이루어진 판타지들은 답답한 마음을 희석시켜 준 '나의 세계'이기도 했다.
현생은 꼭 직업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가 아니더라도 방황스럽고 또 거창히 철학을 헤집고 들어가자면 끝없이 의문스럽고 혼란스럽다. 단지 그 대상과 요소가 매번 조금씩 다를 뿐. 그래서인지 멀리서 보면 그 어떤 시기도 결국 비슷비슷한 거 같기도 하다. 평생을 공들이면서도 긴 시간 단단히 중심이 잡혀있었다 생각했던 그 길도 가까이서 돌아보면 답답하고 갑갑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때마다 지금 이 순간 큰 위기라 눈물 지었을 테지만 지나온 뒤 또 멀리서 바라보면 단단했었다 기억하지 않았던가. 지금 닥친 위기와 방황이 커다란 문제인 거 같겠지만 결국 그냥 늘 있는 위기이자 방황, 그냥 현생 그 자체가 다 그런 걸 지도 모른다.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는 거의 항상 늘 TV속 판타지를 품으며 살았다. 드라마, 연예인, 스포츠선수 등 분야도 다양했다. 비록 10대 이후 일명 덕질, 팬질을 광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은은한 덕후기질은 버리지 못했다. 사실 이젠 너무 많아져서 나의 그들을 다 손꼽아 낼 수도 또 장기간 모두에게 광적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연예인 좋아하냐는 질문에 '너무 많아서 누군지 모르겠어요.' 따위의 황당한 답을 해 버린 황당한 사건이 황당하게도 전혀 황당하지 않다. 이제는 얕고 넓게 다 품어 내느라 바쁜 내 덕질을 그 보다 더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좋아하지만 누군지 딱 선명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간헐적으로는 온 세상이 '그' 하나로 선명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새로운 자극이 나타났을 때가 그렇다. 새로운 판타지의 세계, 새로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 일상이 흔들릴 정도의 파동이 몰아친다. 그리고 그 파동과 함께 열린 새로운 '나의 세계'는 한동안 내 일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상에서 비록 삶의 실속과 동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어딘가에 쏟는 '몰입'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쳐지지도 않는 위기와 방황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몰입해 버리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택한 도피처가 있다면 현생과 판타지 그 경계에서 판타지탈을 쓴 나의 '그들'을 판타지 같은 현실이라 믿어버리는 일이었던 거 같다. 다소 과장된 그들을 과장된 그대로 착각해 버리며 출구를 찾는 일. 그의 손끝하나에도 감정을 쏟으며 이 세상엔 이런 환상이 존재한다 몰입하는 일. 그 힘에 또다시 현생을 살아보기도 하고, 더 오버스러운 날엔 판타지 하나면 세상에 배신감을 느껴도 다 괜찮다 싶은 날이 있기도 하다. 나에겐 나를 황홀시킬 판타지 내 도피처 '나의 세계'가 있으니 말이다.
직업의 의미에 대해 마음속에서 길을 헤매었을 때 때마침 나에게 새로운 '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의 손끝하나까지 다 이해하고 싶던 그때 그의 판타지가 계속해서 더 큰 판타지를 만들어 낼수록 영상을 보고 있던 문 닫힌 방, 그 공간의 전부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고 그 세상은 너무나 컸다. 온 우주가 그로 가득 채워졌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현실 공간에 현실이 까맣게 지워진 채 현실 같은 이상세계만이 내 오감 육감을 자극했다. 어느 날은 세상이 배신해도 괜찮아 '나의 세계'가 있으니...라고 오버스럽게 생각하다 풉 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곧, 살면서 '나의 세계'가 하나쯤은 꼭 필요하겠다는 진지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이 다 헛것이 될 것만 같은 시기에 현생은 위기이자 암흑이지만 또 다른 세계는, 이 정도의 기쁨이 늘 있다면 이 세상 다 괜찮다 느끼게 해 주었으니, 덕분에 그날도 너무 많이 절망스럽거나 심각하지만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현실을 도망쳐 확실히 보장된 힐링타임이 있다는 것, 늘 마음속에 TV 속 판타지를 품고 살았던 나도 현생과 나의 세계를 넘다 들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흘러 흘러 오늘이 오지 않았을까. 한때는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한 사람이 좀 부담스럽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이해를 못 해 줄 때도 있었다. 자기 세계를 현생까지 너무 깊게 끌어들인 그들이 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그들에게 그게 얼마나 필사적인 것이었을지 추측해 본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맞이하고 싶은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열광하는 팬들에 둘러싸여 대규모 콘서트를 하는 그의 영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콘서트 현장보다 더 과한 판타지를 만들어 냈다. 혹여나 어느 날 소개팅 남의 직업이 연예인이라면 당장 열광하거나 신기한 마음에 호기심을 채우지 말고 차분하게 한마디 드려야지,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당신과 당신 직업의 가치는 이 세상에 바로 그런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 중 한 명이 소개팅남이 되어 나타난다면 난 꿀 먹은 벙어리 혹은 얼음 혹은 고장 난 뚝딱이가 될게 분명하다는 현실이 정말 현실스러운 기분이다.) 그리고 혹 예술이 그런 거라면 내 직업의 가치는 현생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판타지의 탈을 쓴 또 다른 세상, 그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는 것에 있겠고,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예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현실 같은 이상세계를 헌정하는 일에 의미를 두고 공들이는 일, 그곳에 마음이 닿아야 마땅한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한다.
-흔들리던 현생에 중심까지 잡아주다니, 다시 한번 덕후, 덕질은 아주아주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