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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Oct 01. 2023

'잘'이라는 건강

건강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 말처럼 진심이면서도 진짜가 아닌 말도 없을 거다.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듯 우리 가족도 이 말의 모순을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자라오는 동안 부모 자식 간에 있을 수 있는 자잘한 문제들이 때때로 가족의 감정을 긴장시키곤 했다. 그때 난 분명히 건강했는데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건강하지 않을 때 보다 문제의 무게가 더 심각해져 돌아왔던 것도 같다. 우리 집에서 발생한 이 모순을 30년 넘게 아빠노릇을 해 온 아빠도 모를 리 없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가끔씩 그 모순적인 말을 뱉곤 하는데 사실 자잘하게 따지면 이 세상에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잘나야 할 게 너무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꼭 지켜야 할 게 있다면 건강 그 이상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아빠가 가끔 그 말을 내뱉을 때면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말은 자식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내려놓는 소리, 초심을 찾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초심을 잃지 말자 본인에게 외우는 주문. 언젠가부터 그 말이 유난히 큰 숨에 실려 힘차게 나오는 거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걱정 마 아빠, 나는 대체로 건강만 해' :)



   대체로 건강만은 한 나에게 완벽한 출발이라 생각했던 새해가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었다기보다 연초 휴가를 이보다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자 나는 다른 도시에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집으로 3박 4일 놀러를 갔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너무 즐거웠다. 전이며 떡국이며 파스타며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요리해 먹고 뒷정리까지 사이좋게 분담해서 해 치우고 나면 침대에 누워 새벽이 깊어지도록 배꼽 잡고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주변에 시끄러울까 봐 쇳소리처럼 목소리를 죽이면서도 배 가죽이 당기도록 정신없이 웃긴 소리를 해 댔다. 낮이 되면 공부도 잊지 않고 했고 각자의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고민해 주었다. 틈틈이 도시 여행도 했고 그 와중에 만난 감탄스러운 풍경에 모든 행운이 우리에게 온 것처럼 의미부여를 가슴 가득 해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쇼핑도 하고 맛있는 밥을 사 먹기도 했지만 일상 그 이상의 특별함은 아니었다. 평소 가보지 못했거나 꿈에 그린 여행지가 아닌, 우리 일상에 깃들어 있던 도시이자 동네였고, 대단히 고가이거나 스페셜한 음식을 먹은 건 아니었으며 쇼핑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공부도 해야 했고 우리의 고민이 어느 해와 다를 것 없이 여전했으며, 작년 연말에도 또 새해 연 초에도 특별하거나 뜻깊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와 미래가 깜깜하도록 불안한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낙천적이게도 '올해는 왜인지 좋은 느낌이야! 잘 될 거야!' 진지하고도 진심이었던 설레발을 쳤다. 아마도 그런 기분을 진심으로 느낀 이유는 딱 하나, 새해, 새 시작이라는 그 기분 때문이었을 테지만, 어쨌든 그 기분에 힘입어 서로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꽉 찬 기분, 그건 완벽한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 시간 누군가는 분명히 우리보다 특별한 새해 그리고 휴가를 보냈을 테고, 나에게도 보다 더 특별했던 새해들이 있었다. 해돋이 여행을 간다거나 파티를 했던 그런 해. 하지만 못지않게 꽉 찬 기분, 그 기분이 선명해진 건 3박 4일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였다. 웃고 떠들며 마냥 논다 생각했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잘 먹고, 잘 놀고, 잘 웃고, 공부도 하고, 열정도 부리고, 미래 계획도 세웠던 꽉 찬 시간이 아니었던가. 이보다 어떻게 더 잘 살아낼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보다 완벽한 출발이 어디 있겠냐고.



   한 생명이 태어나면 그 생명에 대한 안부는 주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기는 잘 놀죠?'

   '아기는 건강하죠?'

   '잘 먹고 잘 자나요?'

   잘 놀고 잘 웃는 아기는 그걸로 되었고, 잘 먹고 잘 자는 아기도 '아휴 잘 됐다, 잘 큰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넘어져도 어떻게든 잘 털고 일어나 다시 살아갈 의지를 보이는 것, 그게 한 인간을 '잘' 채워내는 전부일지도 모를 일이다. 잘 살아 있는 것 만으로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시기이자 작은 것 하나에 감동과 기대를 한 껏 하게 되는 시기, 부모의 마음에 힘이 가장 들어가지 않았고 또 가장 들어간 시기이기도 한, 그 시기에 우리가 한 생명체에게 가지는 소박하고도 거창한 그 바람과 기대, 그게 성인이라는 생명체에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성인의 삶도 딱 그 정도만 챙기면 되지 않을까. 그 이상 인간이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잘 보낸 그 3박 4일을 보내고 자존감과 긍정 그리고 낙관 같은 것들이 '잘'로 꽉 찬 일상에 의해서 오는 거라 생각했다. 그때 우리의 현실과 미래의 불안에도 잘 웃고  잘 놀고 미래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건 '잘'이라는 건강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그 한해 우리에게는 우리가 꿈꾸고 기대했던 기분과는 달리 그다지 기대하고 바랬던 좋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도 꼬박꼬박 일상을 대체로 잘 살았고 그래서 계속해서 여러모로 건강했으며 또다시 연말 연초가 되니 데자뷔처럼 또 다음 해를 낙관하고 기약했다. 그래도 어떤가 어느 한 구석 살아갈 의지를 접지 않고 대체로 '잘' 건강만은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잘 지켜온 건강이 언젠가 생명력이 생겨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낙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 '잘'이 '건강히' 잘 있으니, 더 이상 뭘 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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