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희 Sep 23. 2023

망가질 결심

생활태도

   '몰라 망가질 거야!!!'

   나는 포효했다. 고작 라면을 끓일까 말까 하는 문제 앞에서 말이다. 다이어터도, 건강식품 추종자도, 그렇다고 라면 중독자도 아닌데 라면쯤 먹을 수도 있지 이게 망가질 결심까지 할 문제인가 싶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라면을 계획한 건 단지 게으름이 불러온 욕망이라는 것을 말이다.  



   mbti 유형이 아무리 즉흥파 P 거나 감정형 F여도 모두 어느 정도는 각자 나름대로 세워둔 선 안에서 살아가지 않을까? 자유분방해 보이는 방에도 방 주인 눈에는 규칙이 있다는 말이 SNS에서 공감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예시는 아마도 즉흥파 P와 감정형 F의 삶에도 존재하는 선을 설명하기에 가장 귀엽고도 간단한 예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대로 그리고 기분대로 살아가는 거 같아 보여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들에게도 각자의 규율이란 게 있고 또 그게 있어왔기에 그들의 인생이 그동안 무사했었고, 오늘도 무사할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무사할 이유일 지도 모른다.


   

   라면 먹을 마음 앞에 망가질 결심까지 한 건 단지 그 한순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은 이미 스스로에게 많은 부분 선 넘는 일을 허용했던 날이었다. 이성을 무시한 채 선이 넘도록 욱여넣은 초콜릿과 이미 대충 때운 한 끼, 그러니까 제대로 된 걸 먹은 게 없었고, 계획했던 공부를 그날 하루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스스로를 기꺼이 허용했다. 게다가 그 시간을 대신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쇼츠영상을 무한대로 보는 것 역시 기쁘게 인정했다. 그런데 선 밖 자유의 세계를 넘치도록 양껏 누린 끝에 또 든 생각이 평소에는 딱히 취향에도 없는 라면이라니... 이건 정말 끝이 없는 게 아닌가. 계속해서 허용적이었던 그날 처음으로 갈등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하... 라면 먹을까?'

   '이렇게 살지 말자.'

   '다른 거? 하.. 귀찮은데..'

   '다른 거 먹으면 또 뭐 먹어, 고르는 것도 귀찮...'

   '오늘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이만큼 쉬었으면 됐지...'

   

   더 이상의 선은 넘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와 끝없이 싸웠다. 갈등은 길어질수록 나를 갉아먹는 고통을 창조해 냈다. 여러 방면으로 말이다. 그중에 가장 최악은 머릿속이 갈등으로 가득 차 있는 중에도 아랑곳 않고 침대에 누워 멈출 수 없는 쇼츠 늪에서 철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점, 그 양가적 시간을 인지하면서도 갈등도 행동도 어느 하나 멈출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침대와 핸드폰 그리고 라면, 이 쓰리조합에 맥을 못 추는 내가, 뭐 이런 인간군상이 있나 싶게 꼴 보기가 싫었다. 그럼에도 결국 결론에 이른 것은 육성으로 내뱉은 '몰라 망가질 거야!!!'와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라면 물을 올리는 행위였다. 치열한 투쟁에도 스스로를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강력하고도 하찮은 승부에서 장렬히 패배한 전사... 나는 추측했다. 끝끝내 영양가가 없어 보이는 라면을 스스로 집어 입으로 호로록 삼킬 때면 내 안에 나의 존재는 쓰레기 통에 버려진 휴지조각 마냥 하찮게 구겨질 거라고.... 그런데 라면은 생각했던 거보다 더 맛있었고, 그리하여 냄비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물을 싹싹 긁어먹었다(말아먹을 밥이 없어 아쉬웠다.). 또 덕분에 몸도 마음도 간편했으며, 설거지 역시 쓱쓱 싹싹 휘리릭 두어 번 만에 끝나니 아주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될 걸 진작 끓여 먹었다면, 이라는 생각이 든 건 어떠한 단순함이었던가...



   10대, 20대 시절엔 이따금씩 이런 말을 외쳤다.

   

   '자유롭고 싶어!!!!'

   '마음대로 살 거야!!!'


   그래봤자 고작, 교칙도 나라 법도 잘 준수하며, 선생님 말씀도 잘 들고, 큰 문제를 일으킨 일도 그렇다고 딱히 잘난 것도 없었던 탓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자 성인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젠 더 나아가 '몰라 망가질 거야!!!' 라니! 보다 더 강력한 표현인 거다. 하지만 역시나 그래봤자 고작, 하루에 1-2조각쯤에서 멈춰왔던 초콜릿을 선 넘도록 먹고, 하루쯤 밥다운 밥은 먹지 않았으며, 취향에도 없는 라면을 먹겠다고 게으름을 부리는 정도, 생산성 없이 뒹굴거리며 하루를 써 버린 정도일 뿐인 게 아닌가. 그래, 나태했다면 나태했다. 하지만 결심에 비하면 '고작' 웃길 수도 있는 일.... 라면을 행복하게 먹고 통으로 날린 하루 끝 또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 준비를 하며 마음이 찝찝하거나 하찮은 게 아니라 행복하고 즐거웠기에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잘 살았네?' 잠시 선의 범위를 넓혔다고 무너지지 않고, 살면서 이런 잠시도 없으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어쩐지 마음이 푸근했다. 또 고작 이 정도라면 말이지만, 가끔은 한 번쯤 본능을 인정하며 살아줘야 또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선을 넘는 매 순간 선의 넓이를 인지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나를 갉아먹도록 투쟁한 태도가 그날 하루의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양심이자 위안, 나를 완전히 망가트릴 마음이 없다는 근거쯤... 그 때문에 라면이 맛있었을지도 또 하루의 끝자락 마음 편히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TV프로그램 금쪽상담소에서 본연의 모습과 다르게 스스로를 억압해 온 한 연예인에게 오은영 박사님은 이런 조언을 하셨다. 그냥 조금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될 것 같다고, 그래봤자 까부는 정도밖에 안 될 거 같고, 00 씨 정도면 막살고 싶어도 막살아지지 않을 거라고... 그래, 까부는 정도, 그날 하루 난 자~알 까불었다. 가끔은 힘을 풀어야 더 나아갈 수 있을 때가 있다. 때로는 그 기억이 내일을 더 긴장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놀았으니 더 채워내야 한다는 약간의 긍정적인 긴장감 같은 거 말이다. 그러니 내가 그어 온 규율, 그 선이 과거에도 그래왔듯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삶의 안녕을 지킬 거라는 믿음, 내 정신의 안녕을 책임질 까불어 댄 날의 여유도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 거라는 믿음.... 



   일상을 부여잡고 살다가 때때로 통제가 어렵도록 까분 날에도 나를 갉아먹지 말며 좋은 날이었다 푸근하게 잠들어야지!



이전 04화 잠만보의 고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