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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Sep 12. 2023

잠만보의 고독

   잠은 평생 적이었다. 잠 많은 야행성. 사회가 요구하는 시계와 거꾸로 돌아가는 생체리듬. 때문에 아침은 늘 괴롭고 매일 대부분을 잠이 부족하다는 기분으로 살아왔던 거 같다. 밤을 뜬 눈으로 새우라 한다면 꽤나 자신이 있지만 그럼에도 부지런한 이미지는 얻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 고통받는 것도 나였지만 게으른 죄인이 되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 역시 내 몫이었다. 게다가 한창 붐을 일으켰던 미라클 모닝까지. 잠 많은 야행성이 살기 억울한 세상이 아니었던가....



   평생소원이 있다면 이른 아침 알람 소리 없이(아니, 알람 소리에 의해서라도 부디) 상쾌하게 눈을 뜨는 삶을 살아보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면 하루가 얼마나 쉬워질까. 그런데 막상 떠올려 보면 꼭 아침이 아니더라도 몇 시에 일어나든 몇 시간을 잤든 상쾌하게 일어나지는 못했던 거 같다. 이건 아마도 불면의 고통을 모르는, 한편으로는 복 받은 팔자가 감내해야 하는 몫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모두가 알아주는 불면의 고통만큼 알아주는 이 없이 외롭게 감내해야 하는 잠 많은 잠만보의 삶도 못지않게 고통스럽다. 아니, 내 고통이라 그런지 더 외롭고, 더 씁쓸하고, 더 고독하고, 더 고통스럽다고 주장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라는 다소 공격적인 이 말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꽤 영웅적인 말처럼 쓰였다. 그리하여 잠을 많이 자는 행위는 게으름으로 비난을 받고 잠을 줄여가며 생활하는 행위는 부지런함으로 해석되어 칭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한 건, 그렇다면 아기 시절 잠을 잘 잔다는 이유로 왜 예쁨을 받았었던가 하는 거다. 나는 잠 잘 자는 아기로 평생 잠으로 받을 수 있는 예쁨을 그 시절 다 받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어린이집 그리고 유치원 생이 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같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시절 우리 집 아침은 엄마 아빠 할 거 없이 내 이름을 수십 번 불러 깨우는 일로 시끄럽고 분주했다. 그러다 못다 한 숙제를 하느라 스스로 새벽같이 일어나 숙제를 하던 날이면 마음 한편 그토록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밝아온 아침, 나를 깨우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을 때 책생에 앉아 빼꼼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이면 가슴 가득 당당함이 당당히 자리를 메꿨다. 비록 밀린 숙제를 반쯤 덜 깬 정신으로 정신없이 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잠이 많다고 해서 잠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한 번 빠져들고 나면 깨어나기 힘들 뿐이자 하루 컨디션에 어느 누구의 잠 보다 지대한 영향력을 행세했기에 대체로 컨트롤할 수 없는 내 삶의 방해꾼일 뿐이었다. 안 자려고 버티거나 깨어나려고 사투를 벌이느라 피로가 쌓이는 알 수 없는 굴레 빠져 있었다. 즉, 삶의 대부분을 그의 지배 아래 그에게 꽉 잡혀 살아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특별히 모난 게 아니라 느낀 건 나와 비슷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중 특히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A, 잠이라면 A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생각해 왔기에 나에게도 그러했듯 그에게도 잠이란 곤란하고 불편한 존재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잠은 자신에게 좋아하는 행위이자 취미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수면의 양에 대해 소개할 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맞는 수면시간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매번 너무 나태해지지 않을 만큼만 자고 일어나려고 마음을 먹으나 실패하고 좌절하는 변하지 않은 규칙에 힘겹지 않았던가. 그는 하루 9시간을 자면 가장 컨디션이 좋고 8시간을 잔 날은 약간의 피곤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맞장구를 치며 내 적정 수면양에 대해 소개하고 싶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세상이 말하는 권장 수면시간, 성인이라면 최소 6시간에 7~8시간을 권장 수면시간이라 말하는 뉴스기사만을 의존해 충분히 자고도 컨디션 난조를 겪는 나를 자책하거나 피곤을 게으름으로 비판해 온 나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게으름이 꼭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며 많은 수면양이 결코 잘못된 일만은 더욱이 아닐 테다. 실로 나 역시 9시간 잔 날의 하루는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했고, 8시간이면 조금 피곤한 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져보니 9시간을 잔 날은 하루의 에너지와 능률 그리고 집중력이 확연히 다른 게 아닌가. 잠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또 나를 더 나아가게 만드는구나. 이를 이해하던 순간은 많은 잠이 결코 게으를 리 없다는 위로를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고작 잠 따위 하나 컨트롤 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는 삶을 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하여 예전엔 더 잘 살고 싶어 잠을 미뤄가며 능력을 채웠다면 이제는 수면양을 채우는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단언 더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 태생을 예시로 들자면 잠의 리듬은 타고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 타고나길 야행성에 잠 많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그로 인해 문제적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가지고 태어난 생김 그 자체가 비난이 되고 문제적 인간으로 여겨진다면 내 삶은 태생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차지 못하다는 뜻이 되는 게 아닐까. 잠 많은 인격은 소중하다. 잠은 이 세상을 더 잘 살게 한다. 당사자에게도 세상에게도 말이다. 잠이 부족한 사람은 예민하고 까칠해지기 쉽다. 피곤하니 넓은 아량이나 여유도 갖기 어려워질 테고 일의 능률 역시 떨어질 확률이 높을 테다. 또 그런 민감한 에너지를 세상에 뿜어내면서 사는 건 본인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 어울려 사는 한 세상에도 영향을 가한다 생각한다면 잠 잘 자는 인격은 귀중하다. 그러므로 피곤하거나 예민하지 않은 인격과 활기와 여유 그리고 몰입, 9시간으로 인해 만들어진 하루를 맞는 날엔 나를 그리고 세상에 더 낫게 할 값진 시간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 태어나 로망이 있다면 쉬는 날 부지런히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 세상을 여유 있게 즐기는 일이다. 헤롱헤롱하지 않고 상쾌하게 말이다. 이른 아침 차분하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 그리고 맑은 공기 그러나 분주하지는 않은 마음. 읽고 싶은 책이나 영화를 보아도 좋고, 좋아하는 공간에 가도 좋다. 어쨌거나 지켜야 할 약속은 없으나  올곧은 정신으로 오전 세상과 교감하는 낭만, 그 낭만의 연속성, 이는 잠 많은 야행성에겐 그저 꿈일 뿐이다. 9시간의 마법도 일으킬 수 없는 기적이다. 현실은 수십 번의 알람과의 사투 그로 인해  쫓기는 시간과 차려지지 않는 정신의 연속성 속에 도무지 빨라지지 않는 느릿한 행동에 마음만 분주한 아침을 맞는다. 다만 나아진 점이 있다면 최상의 오후가 되길 기다린다는 점이다. 아마도 꿈같은 아침의 연속은 불면증을 걱정할 리 없는 잠이라는 선물이 꾸게 하는 영원한 꿈인 거 같다. 고독히 꾸어야 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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