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1.
일주일간 공부해온 결과물을 분석하는 식의 일대일 수업이 있다. 만약 학생이 유독 더 엉망진창으로 숙제를 해 왔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 혼을 내거나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그 이유에 대해 말한다면? 초, 중, 고, 대를 한국에서 교육받은 내가 선생님의 반응을 추측해 보겠다. 핑계 대지 말라고 하거나 사정은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너는 학생이고 이걸 이렇게 해 오면 안 된다고 하셨을 거다. 정신력과 책임감 또는 학생의 본분 운운하면서 말이다.
문제 2.
“남자 친구 3명을 동시에 사귀어. 월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화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수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목요일에 또다시 월요일에 만난 놈 만나. 넌 젊으니까 괜찮아.”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도 내가 추측하는 바로 어른들의 반응은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조언을 할 거다. 그런데 조금 더 자극적인 전개로 이 발언을 선생님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했다면? 과연 믿기기는 하는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 누구에게 들려준다 하더라도 선생님 자격을 운운하며 분노를 표하지 않을까? 당장 그 선생님과 관계를 끊어버리라거나 교육부에 고발해 버릴 태세 일지 모른다.
언젠가 선생님, 교육자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단순하게는 가르치는 일이며, 전문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이들의 몫은 ‘잘’ 가르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명감이 단지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격을 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결국에 학생 삶의 넓은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닐까? 크든 작든 학생의 정서와 생각에 영향을 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학생을 위하는 마음이 가장 아래, 가장 크게 자리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학생을 위하는 마음'과 같은 말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떠올릴 때 꽤 식상하게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식상한 것이 과연 얼마만큼 순수하게 잘 이행되고 있는 가를 생각한다면, 종종 따져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생각이기도 하다.
어느 때인가 나는 몇 날 며칠을 정말 아팠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묵직한 돌이 가슴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었고, 생활과 감정 등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심정으로는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뒤 수업을 한 주 쉬어야 했고, 그게 마땅했다. 하지만 해 내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이 든 건 왜 일까? 우선 내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그럼에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잘 해내는, 능력 있는 학생이 되고 싶었던 거 같다. 또 내 감정이 핑곗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삶 전체가 뿌리 채 흔들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살아내야 했다. 잘. 괜찮은 척.
꾸역꾸역 수업 준비를 해서 선생님 앞에 섰다. 제대로 준비가 됐을 리 없었다.
“준비 상태가 왜 이런 거야?”
“......”
“어떻게 된 거야?”
“....... 사실 저번 주에 힘들었어. 공부 문제는 아니고, 그냥 내 삶의 문제야.”
능통하지 못한 이태리어로 모든 상태와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삶의 어떠한 문제가 나를 힘들게 했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는. 하지만 사실 마음을 나누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선생님은 삶의 문제로 힘들었다는 그 한마디만으로 내 감정을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너를 힘들게 했는지 자세히 따져 묻지 않았다.
“알겠어, 윤희. 하지만 넌 나에게 힘들어서 수업을 쉬어야겠다고 말해야 했어. 오늘 너는 수업을 쉬어야 했다고.”
“알아. 하지만 나는 해내고 싶었어. 네게 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어.”
“이해해. 네 마음 알아. 그래 해보자.”
수업은 지난 일주일 동안 해온 숙제를 가지고 선생님과 같이 분석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선생님은 숙제를 분석하다 말고 이런 질문을 했다.
“너 남자 친구 있어? 걔가 말썽이야?”
“아니 없어. 그냥 내 인새... o..”
“만약 남자 친구가 문제라면 너를 힘들게 하는 놈이랑 헤어져. 다른 놈 만나. 아니 근데 너 왜 남자 친구 없어?”
“몰라...”
“넌 젊었어. 남자 친구 3명씩 만나.”
“3명? 3명을 동시에 만나?”
“응. 그래도 돼. 넌 젊었어. 남자 친구 3명을 동시에 사귀어. 월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화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수요일에 만나는 놈 하나. 목요일에 또다시 월요일에 만난 놈. 넌 젊으니까 괜찮아.”
“크하하하”
“그래 웃어 윤희. 넌 아티스트야. 행복하게. 밝게. 수업 끝나고 당장 남자 만나러 가.”
“남자는 어떻게 만나?”
“세상에 남자는 많아. 다음 주에 나한테 남자 친구 이야기해줘.”
준비된 숙제 상태가 좋았을 리 없었고,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그는 숙제를 보고 저번 주의 네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리곤 남은 시간 나를 웃게 하는데 전부를 썼다. (남자 친구 3명을 동시에 사귀라는 말은 장난 아닌, 진심 같았지만.)
평소 그는 잔소리가 굉장히 많은 선생님이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엄격하진 않았다. 표현은 무뚝뚝했지만, 늘 내 근황을 궁금해하며 속정이 넘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학문 앞에서는 냉정했고 칭찬에 인색했으며 늘 더 완전에 가까운 걸 요구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내 정신 상태와 숙제 상태에 대해 한마디도 잔소리를 하지 않다니. 마지막까지 ‘웃어. 행복해야 해. 남자 친구 3명 사귀어. 넌 젊어.’라는 잔소리만 마음껏 늘어놓다가 수업을 끝냈다. 난 정말 웃었고,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수업이자 배움이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렇다. 무너져버린 내 정신 상태에 대해 ‘온전히’ 인정받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선생님이라는 존재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대화의 끝엔 꼭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따라붙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학생의 감정 회복에 집중하기보다 교훈 투척 또는 인생의 가르침으로 정서적 교감과 선생님의 몫을 다하셨다.
그가 내 마음을 풀어주기를 마음먹고 가장 먼저 ‘남자 친구’라는 대상을 끌어들인 건, 아마 젊은 학생에게 가장 자극적이고, 때로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가장 웃게 하기 쉬운 대상이어서가 아닐까? 개인적인 감정 문제를 알려고 하지도, 개입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조금 가볍게 마음을 열 수 있는 법을 그는 알았던 거다.
그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제를 들고 애써 웃는 얼굴로 꾸역꾸역 나타난 나에게 ‘네 의지를 높게 산다.’ 따위의 칭찬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내야 했다. 잘. 괜찮은 척.’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타난 나에게 '수업을 쉬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너는 수업을 쉬었어야 했다.'와 같은, 오히려 다소 진지한 한마디를 했다. 나는 그날에서야 쉰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힘들어도 해내는 법을 배워왔지 쉼을 배워 본 적이 있었던가? 어떤 이유의 휴식이든 그때마다 늘 죄책감이 공존하진 않았던가?
내 인생 최고의 수업을 선사해 준 그는 힘들다는 학생에게 고작 '남자 친구 3명을 동시에 사귀어.'라는 말 따위나 남겼다. 내 인생 최고의 수업이 그 어떤 멋있고 감동적인 명언이 아닌 불순하기 그지 짝이 없는 한마디 때문이라니.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는 ‘네 마음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아픈데 쉬지 않은 건 잘한 일이 아니다. 웃어라. 행복해라. 네 젊음은 소중하다.’라는 가치를 가지고, 오로지 학생을 위한 마음만으로 선생님으로서 최고의 성과, 최고의 수업을 진행해냈다. 선생님들이 흔히 쓰는 ‘다 너희를 위해서야.’라는 말은 인간 내면을 어루만질 때 가장 적합하게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존재,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가?
사진 출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