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초로 캐리어에 감동을 받았다

낡은 캐리어/ 여행의 본질

by 정윤희

살이 아프도록 뜨거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처음으로 맞이하던 때였다. 늘 그렇듯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버스를 타는 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올라탄 버스에는 현저히 줄어든 승객과 그 마저도 외국인 (주로 동양인, 어쩌면 서양인들의 모습은 국적별로 구별 짓지 못해 동양인 아니면 이탈리아인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탈리아 할아버지들이 듬성듬성 채워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 한건 아니었음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누군가 이탈리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해 주기 전 까지는.




“이번 주부터 서서히 가게들이 문을 닫을 거야. 살 거 있음 미리미리 사 둬야 해. 다들 문 닫고 도시를 떠나. 여기는 집 지키고 개들 지키는 노인들만 남겨지고 그래.”




그제야 버스에 유독 아탈리아인이라고는 할아버지(간혹 할머니)뿐이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정말 동네는 화려한 태양이 무색하도록 서서히 차분해졌고, 도시는 말 그대로 텅 비워졌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년 여름, 한 달의 휴가 동안 여행을 떠난다. 이들에게는




‘여행 계획을 짜며 일 년을 산다.’


‘여름휴가 한 달을 위해 일 년을 버틴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한 달을 일 년 내내 고대한다. 즉, 이들에게는 캐리어에 짐을 싸는 일이 익숙한 일이자 값진 일인 것이다.




중앙역(기차역이자 지하철 역)에는 늘 오고 가는 캐리어들로 분주하다. 중앙역에 가게 될 때면 캐리어를 끈 사람들을 구경하곤 하는데, 이건 캐리어에 대한 편견이지만, 꼭 캐리어는 여행자를 뜻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들을 섣불리 여행자라 치부하며 바라보곤 한다. 그날도 많은 캐리어들이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나 또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어느 한 캐리어 뒤에 줄을 섰고, 자연스레 시선을 캐리어로 옮겼다. 발 앞에 놓여있던 캐리어는 까만색으로 된 천 가방이었고, 꼬질꼬질 낡아 있었다. 바퀴는 360도 회전이 불가해 보였고, 마치 2000년대 초중반, 집 창고에 있었을 법한 캐리어와 닮아있었다.




코로나 시대가 오기 직전, 한국은 몇 년 동안 ‘해외여행’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여행사의 호황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고, ‘해외’가 포맷인 텔레비전 프로가 쏟아져 나왔다. 세계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SNS가 인기를 끌었고, 그들이 낸 책 또한 인기 몰이를 했다. 그리고 이 열풍에 얼떨결에 호황기를 맞은 시장이 있었다. 그 운수 좋은 시장은 바로 ‘캐리어’.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 위해 캐리어부터 사기 시작했다. 사이즈를 따졌고, 디자인을 따졌으며, 브랜드를 따졌다. 물건을 실어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음에도 360도 회전하지 않는 구식 바퀴가 문제가 되었고, 유행 지난 스타일이나 꼬질꼬질 낡아버린 상태가 문제가 되었다. 이 모든 이유가 새 것을 장만해야 할 이유로 마땅하게 여겨졌다. 즉, 어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가느냐부터가 해외여행의 시작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짐을 실어 옮기는 가방의 껍데기가 ‘여행’이라는 문제에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던가?




중앙역에서 족히 15년은 더 되어 보이던 캐리어를 보며, 이들 가슴속 자리 잡힌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낡은 캐리어는 그들의 자산상태를 대변하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캐리어를 쓰지 못해도 여행은 한다는 게 그들이 가진 인생관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낡은 캐리어가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다. 돈 그리고 보이는 그 어떤 것에 연연하기보다 인생 공부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또 이러한 생각이 나의 완전한 편견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낡은 캐리어를 끌고 나온 그들은 적어도 여행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잊지 않고 여행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앙역에서 낡은 캐리어 뒤에 줄을 서게 된 일은 단 한 번, 특별한 경험이 아닌, 때때로 경험이 가능한 그런 일이었다. 발 앞에 놓인 낡은 캐리어가 감동스럽게 다가왔던 그날, 그 캐리어 주인, 그가, 그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관은 결코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